김총무는 ‘줄눈’ 같은 사람이다. 주로 박대장의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얼마 전에는 그가 담당했던 리빙박스를 열어본 연희 선배가 말했다.
“김총무가 없으니까 대번에 표시가 나는 구만.”
리빙박스에는 뒤풀이에 필요한 일회용 수저, 그릇, 병따개, 휴지 같은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그것들도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가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 일회용 숟가락이 모자라는가 하면 키친타월도 사라졌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김총무가 생각났다. 그는 알고 있을까? 누군가 자신을 숟가락이나 병따개 따위로 떠올리고 있다는 걸.
그나저나 리빙박스는 지금 내 차에 실려있다. 세트인 양은 들통, 대형 가스버너와 함께. 이들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온다. 원치 않아도 그것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럴 때 옆에 탄 사람이 누구건 간에 소리의 정체를 물어보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김총무가 떠올랐다. 아마 요즘 그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나지 않을까.
작년 6월, 김총무와 지리산 종주를 갔다. 일박 이일 일정이었는데, 첫날은 성삼제에서 시작해서 장터목까지 26.9킬로미터를 걸었다. (2년 전 첫 지리산 종주 이후 나는 7번 종주를 했다) 새벽 3시 30분에 시작한 산행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소요시간 16시간. 먹고, 휴식한 2시간을 빼고도 족히 14시간은 걸었다. 나는 장터목 대피소를 5킬로미터 남겨둔 지점부터 나도 모르게 뭔가를 중얼거렸나 본데(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나보고 뭐라는 거냐며 큰소리로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로봇이다. 아무 고통도 느낄 수 없는 로봇이다.”
나는 IBM 왓슨처럼 말했다.
“하여튼 엉뚱하기는.”
그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얼마쯤 아무 말없이 걸었다.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서 축축한데 해까지 져버려서 한기가 들었다. 아무리 걸어도 대피소는 보이지 않았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아, 그거 효과 있네, 훨씬 덜 힘든데?”
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고통이 반감되는 효과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우리는 동병상련, 전우애 비슷한 감정도 나눈 것 같다.
"김총무 위암 수술했어. 김총무가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수송동팀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지리산을 다녀오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박대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지리산을 갔을 때 수술 날짜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지리산을 다녀오고 이틀 뒤에 김총무는 위암 수술을 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그러느라 그 속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싶어서 나는 그만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수원에 한 달짜리 좋은 알바가 있어서 간다고 하길래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김총무의 암은 다행히 조기에 발견이 되었고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어야 했는데, 그의 아내가 식사를 살뜰하게 챙겨준 덕분에 의사도 놀랄 만큼 회복이 빨리 되었다. 집 근처 천변 걷기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수술 6개월 뒤쯤에는 월명산을 세 바퀴를 돌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그런 그가 오늘 인천으로 이사를 간다. 한국지엠 직원인 그는 군산공장 폐쇄로 휴직하고 있었고, 최근에 부평지점으로 발령이 나서다. 주말 부부를 할 수도 있지만 먹는 걸 잘 챙겨야 하는 그를 아내가 걱정을 해서 이사를 결정을 했다고 했다.
김총무는 어렸을 때, 아이들이 흔히 갖는 과학자나 의사 같은 꿈이 없었다고 했다. 가게를 해서 바쁜 부모님을 보면서 자신은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저녁이면 가족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직업이면 그걸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일찍부터 중요한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소중한 건 내 가까이 있는 작은 거라는 걸 말이다. 그는 지금도 꿈을 가지고 있고 그걸 지키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닐까? 김총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줄 아는 줄눈 같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