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할 때 우의를 입으면 젖지 않을까? 아니다. 젖는 건 똑같다. 몸에서 땀이 나기 때문에 금방 몸이 척척해진다.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처럼 밖에서도 비가 오고 몸에서도 비가 오는 기분이다.
호남정맥 37구간 산행은 시작부터 비가 왔다. 새벽 5시 30분에 버스를 타서 8시에 빗속으로 걸어가자니 말로 하지 못할 복잡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투닥투닥 제법 굵은 빗줄기가 우의로 떨어지고 이내 빗물이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뜬금없이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이제 빨래할 시간이야’
서글픈 첫발을 내디뎠다. 모두들 얼굴이 나만큼이나 어두웠다. (사진 참조) 각자 마음속으로 일요일 아침에 따뜻한 아랫목이나 뜨거운 욕조, 푹신한 침대에 있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하다가 진흙길에 미끄러져서 철퍼덕 앞으로 꼬꾸라졌다. 산행 시작 20분 만에 넘어지는 신기록을 세웠다. 온천탕이 진흙탕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몸도 버리고 마음도 버렸다. 사방으로 들이치는 비도 장단을 맞춰주니 미련도 없었다.
걷다 보니 한기가 사라지고 몸도 풀렸다. 초입인 노고재에서 문유산을 오를 때까지는 급경사에다 길이 안 좋았고, 아니 길이 없었다.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는 건 호남정맥의 백미이고 오늘은 비까지 오니까 금상첨화가 아닌가? 이렇게 정신도 놔버렸다.
하지 만밥 먹을 때만큼은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리 큰 소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들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비가 조금 잦아드는가 싶을 때 시계는 11시를 가르쳤고 마침 평평한 땅에 있는 어느 창고 앞에 다다랐다. ‘여기서 먹으면 되겠다’며 도시락을 꺼내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수환 씨가 쉘터(차를 덮는 용도의 비닐)를 꺼냈고, 정금 선배님이 방수천을 꺼냈다. 이렇게 12명은 쉘터팀과 천막팀 두 팀으로(우리는 군산종주팀이다) 나뉘었는데, 나는 어영부영하다가 천막팀에 끼게 되었다. 정금 선배님은 방수천 끝을 등산화 끈으로 묶어서 옆에 있는 장대를 폴대 삼아 천막을 쳤다. 나는 “잠깐만요, 선배님. 비가 다 들어오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비를 흠뻑 맞고 있는 선배님에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걸 본 이상 이제는 쉘터팀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반면쉘터팀의 커다란 비닐 속에서 뭔가를 따라주고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화기애애하고 익숙한 음향. 그러면서 나한테 (건성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나는 빗물 젖은 밥을 먹기로 했다. 도시락으로 싸온 두릅과 풋마늘도 우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밥을 빨리 먹은 나는 셀터팀에게 “언제까지 먹느냐?”며 그들도 빗속으로 나오기를 종용했다. 이제 밥까지 먹은 마당이 라비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바랑산으로 가는 길에 ‘뽀뽀 쉼터’라는 표지판이 있어서 사진도 찍었다. 그 뒤부터는 길이 있었다. 물론 임도를 놔두고 산길을 갈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길 여기 있는데요?”
‘좋은 길 놔두고 왜 산으로 올라가냐’는 취지의 말이었지만 세 번째로 내가 이 말을 할 때쯤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튼 마지막 송치 솔재로 내려올 때는 모두 개운한 표정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하산주를 먹으려고 하니 옳다구나 하고 다시 비가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이제는 바라지도 않았다. 절묘한 타이밍의 비 덕분에 휴게소에서 (네, 등산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 중 하나가 접니다) 닭강정과 맥주를 먹었고,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아참, 이날 나는 버스에 배낭을 두고 집에까지 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를 많이 맞으면 ‘급성 건망증’이 걸리는 게 아닐까? 끝까지 비 탓이다.
추신: 집에 가서 배낭이 없어서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모두들 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