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라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김어준과 게스트가 청취자의 사연을 듣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형식인데, 한 번은 마흔의 남자가 상담을 해왔다. 자신은 안정된 직장인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으며 연애도 꾸준히 한다고 했다. 취미생활도 만족스럽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울증은 아닌데 그저 사는 게 뻔하고 지루하다고.
이날은 강신주박사가 나와서 이렇게 진단했다.
“이 분은 비 오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실제로 비를 맞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진짜 연애를 하고, 영화를 본다면 의미가 없을 수 없다고 했다. 해결책으로 생계를 끊고 무일푼으로 여행을 떠나보라고 했다.
나라면 호남정맥을 추천하겠다. 호남정맥을 시작할 때면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심란했는지 모르겠다. ‘지난달에는 시작부터 비가 왔는데 이번에는 비라도 안 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왜 이렇게 덥지? 6월이니까 더워질 때도 됐지, 그래도 아직 오전인데 너무하잖아? 좀 있으면 아예 찜통이겠군’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일반 산행은 정상까지가 힘들고, 나중에는 편해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는데, 호남정맥 산행은 할 때마다 힘들고 마지막까지 힘들다. 시작할 때 복잡한 심경이 되는 건 여차 하면 차에 남아버릴까 하는 갈등 때문이기도 하다. 뒷걸음치는 마음과 달리 두 다리는 앞을 향했고 그렇게 땀을 한바탕 흘리고 났더니 소란스러운 정신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호남정맥 길은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는 길이 대다수다. 우리 팀 외에 등산객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번에는 제일 앞에서 걷던 박대장이 죽어있는 고라니를 옆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야생동물만 지나다닌 길을 한참 걷노라면 꽤 먼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에 있으면 편한데 을씨는 산에 왜 와요?”
뒤에 따라오던 을씨한테 물었다. (혼자 쉬면 처지니까 이럴 때 질문을 하면 좋다)
“등산할 때 흘리는 땀은 냄새가 심하잖아요. 사우나할 때랑 달라요. 몸에 노폐물이 빠져서 그런 가. 나중에는 몸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을씨는예전에 잠꼬대로 욕을 했는데 자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했다. 내성적인 성격인 그가 직장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지금은 아침마다 테니스를 치고, 등산을 하면서 잠꼬대가 없어졌다고.
오늘은 38구간으로 농암산, 갈매봉, 갓꼬리봉세 개의 산을 올랐다. 네 개던가?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를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니까. 임도가 나와도, 내리막이 나와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산악회 버스가 보일 때까지 어떤 말에도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제멋대로 기대했다가 실망한 채 다시 오르막을 오를 때면 쉽게 마음을 줘버린 자신을 얼마나 원망하게 되는지 모른다.
마음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철통수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산행이 끝났다. 그래도 끝은 있었어, 감격해하고 있는데 팀장님이 건너편에 있는 식당(휴게소)에 얘기했다며 샤워장을 사용하라고 했다. 여자들만. 아, 샤워라니. 그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지 나는 그만 감개무량해졌고, 씻고 난 뒤에는 세상에 태어나 옷 한 벌은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타타타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식당 뒤편 테라스를 빌려서 얼음맥주와 냉채족발을 먹었다. 어제 야채와 족발을 사고 소스는 겨자와 식초를 넣어서 새콤하게 만들었다. 땀을 잔뜩 흘린 뒤라 야채가 달았다. 얼음에 파묻어놓았더니 아삭함이 살아있었다. 모두들 앞접시(일회용 국그릇)에 야채를 담고 소스를 부어서 먹었다. 그런데 소스가 부족했다. 유선수가 말했다.
“소스 더 없어?”
내가 쳐다봤다. 째려봤다고 생각했을까?
“야채에서 국물이 나와서 딱 맞네.”
유선수가 곧바로 정정했다.
후식으로 박대장이 산딸기즙을 샀다. 박대장이 앞서서 가고 뒤에 가던 우리 9명은 길을 잘못 들어서 30분을 알바를 했다. 구박을 좀 했더니 지갑을 연 것 같았다. 식당 사장님은 나를 보고 “아가씨”라고 했고, 을씨는 여벌 옷을 가져오지 않아서 씻고 땀에 전 옷을 다시 입었다. 오늘 밤에는 잠꼬대가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