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Oct 31. 2020

암호해독

준이가 쓴 식의 x인지 괄호인지 모를 글자를 한참을 들여다봤다. 지금 하는 단원은 미분으로 f(x)와 f’(x)가 난무하는데 글씨까지 엉망이어서 계산을 하려니까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서퍼라도 된 것 같았다.


“준이야, 너 암호해독까지 하느라 수고가 많구나?”

“암호해독? 문제가 어렵다고요?”

“아니, 금방 네가 쓴 식을 보고 내가 계산했잖아. 무슨 뜻일까?”

“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찾아라, 뭐 그런 말이죠?”

“그래.”

“선생님이 문제를 잘 풀었다?”

“땡”

“문제 푸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땡! 맥락을 이해해봐.”

“맥락이라...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해야겠네요.”

“감수성은 무슨... 네 글씨를 읽는 게 암호 해독하는 수준으로 어렵다고!”


준이는 “아, 그 뜻이었구나”하더니 “그런데 선생님 저는 잘 쓴다고 쓴 건데요?”하면서 연습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보여줬다. 그러고 보니 연습장은 새 것이었고, 문제를 풀 때마다 번호를 달고 꾹꾹 눌러쓴 글자가 보였다. 


2월에 처음 과외를 시작할 때 준이는 연습장이 없었다. 그냥 문제집 여기저기에 풀었다. 충분한 공간이 없으니 식이 있을 리도 없고 희미하게 쓴 글씨는 뭔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단순 계산도 매번 틀려서 끝까지 계산하는 것을 보고 교정을 해줘야 했다(보고 있으면 분통이 터진다). 분수의 곱셈을 하는데 (자기가 조금 아래에 쓴 걸보고) 분자끼리 약분하고, 이항 하면서 부호를 바꾸지 않는 실수가 다반사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식을 쓰지 않고서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또 자신이 쓴 식을 눈으로 보면서 검산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오답을 고칠 때에도 처음부터 다시 풀기보다는 식에서 틀린 부분을 확인하고 고치면 자각과 교정을 동시에 할 수 있다. 


계속 연습장을 갖고 오지 않던 준이에게 새 연습장을 주었다. 이상하게 준이는 그 연습장은 빼먹지 않고 갖고 다녔고 금세 한 권을 다 썼다. 그리고 다른(쓰다 만 노트) 연습장을 갖고 왔다. 수학 연습장은 그래프로 그려야 해서 선이 없는 게 좋다고 지나가는 말로 했더니 다음에 준이가 산 것은 무선에 한 페이지에 네 칸으로 나뉘어 있는 두툼한 연습장이었다. 문구점에서 여러 개의 연습장을 놓고 뭐가 좋을지 고민했을 녀석을 생각하니 맥락을 몰랐던 건 내가 아닌가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수강 취소할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