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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14. 2020

이번 시험 망한 것 같아요


"이번 시험도 망한 것 같아요."

기말고사 3일 중 첫날 시험을 본 몽자가 말했다.

"무슨 과목 쳤는데?"

"국어, 영어, 기술가정요, 기가는 한 번도 안 보고 쳤어요."

"초능력을 테스트해보려고?"

"아뇨, 다른 과목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요."    


내일은 수학 시험이 있지만 몽자는 오늘 망친 시험 때문에 공부할 기분이 영 아닌 모양이었다. 그 기분 잘 알지, 어제 못 쓴 글 때문에 오늘도 쓰지 못하는 뫼비우스 띠 같은 굴레에 나도 자주 걸려드니까.    


어차피 이 기분으로 바로 수업하기도 글렀고 도움도 안 되는 충고도 하기 싫으니까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박산호 작가의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라는 책 중에 '쓰레기를 쓰자'를 읽었다. 그녀는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해 출판 계약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그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글을 쓸 때마다 잘하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쓰레기를 쓰자'라고 마음먹고 글을 쓴다는 또 다른 작가의 글을 읽은 후 박산호 작가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잘하지 못해도 좋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뭔가를 시작해서 끝내는 습관을 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늦게 깨달았다. 못해도 좋으니 일단 끝까지 하고, 마음에 안 들면 고치고 또 고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잘할 날도 오겠지. 언젠가는 펜을 내려놓고 흡족할 때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저 다행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자 몽자는 물개 박수를 쳤다. 너도 깨달음이 온 거냐?   

"너는 내신 몇 퍼센트야?"

"20퍼센트요."

"그래. 성실하게 3년을 보내느라 고생 많았다."

몽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상위 80퍼센트 안에 들어가야 시내에 있는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데 너는 안정권에 있는 거잖아."


학원에 근무할 때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상담하던 일이 떠올랐다. 시내권 고등학교에 떨어지면 도시 외곽에 있는 정원 미달된 학교에 가야 하는데 자녀가 분위기에 휩쓸려 공부에 손을 놓을까 봐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야니 너는 효도한 거야."


지금 성적은 당연하고 더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시작부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금만 어려워져도 망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포기해버리기 십상이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30살의 줄리가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고 365일 동안 524개의 레시피에 도전하는 걸 블로그에 올리는 이야기다. 줄리는 매일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성공한 친구들, 엄마의 잔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자신과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줄리아만을 생각한다.    


50년 전 줄리아도 줄리와 다르지 않았다. 자상한 남편이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먹는 걸 좋아해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국인을 위한 요리책'집필을 계획한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프랑스에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시간의 강을 타고 내려와 줄리 앞에 오게 되었고 줄리는 줄리아를 등불 삼아 그 길을 걸어간다. 앞이 캄캄한 길에 먼저 간 누군가의 발자국에 용기를 얻는 것처럼 줄리는 그렇게 줄리아에게 의지한다.    


각본과 감독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의 노라 애프론이 맡았다. 최근에 나는 노라 애프론의 에세이 두 편을 내리읽었다. (박산호 작가는 자신이 번역한 책 중 노라 애프론의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가 묻히기 아까운 책이라고 했다) 읽고 나서 나는 아, 나도 이런 중년,  섹시한 할머니가 될 테야!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지금은 별세한 노라 애프론의 마지막 영화가 궁금했다. 가까운 친구가 하나씩 세상을 뜨고 자신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 때쯤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었을까?    


작지만 자기의 목표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집중할 때 내가 별이 되고 먼 훗날 누군가 그 별을 따라 걷게 되는 이가 있을 거라는 걸 보여주었다. 평범한 내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에 집중할 때 비로소 특별해진다는 걸 말하려 했을까?    


줄리와 줄리아에게는 사려 깊은 남편이 있었다. 세상의 평가는 친절하지 않고 각자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나를 취사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곁에서 끊임없이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몽자한테 톡이 왔다.

"선생님 저 수학 잘 봤어요!"

다행이었다. 과외가 잘릴 위험이 줄어들어서 나에게 다행이었고 포기할 뻔한 한 고비를 통과한 몽자한테도. 무엇보다도 몽자는 이번 주 수업을 안 한다는 내 말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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