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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4. 2020

코로나 19가 없었던 크리스마스

4일 연속 술을 마시고 무기력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기온이 5도라니(낮에는 8도였다).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어디를 갈 수도 없다. 뭐 이런 크리스마스가 다 있는 건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앉아서 지난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였다. 남편과 아이는 시댁에 가서 집에는 나 혼자였다. 맥주 캔을 들고 와서 TV를 켰다. 연말 시상식이 방송 중이었고 화려한 연예인들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화면에 멍한 시선을 둔 채 맥주를 마셨다. 바쁘게 살고 있는 건 확실한데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은 없는,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심정이었고 그 때문에 조금 울적했다. 하지만 금세 올라온 취기와 피로 때문에 곧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눈이 잔뜩 와있었고 어쩐 일로 전날 술을 마시지 않은 덕분에 컨디션이 좋았다. 보미를 데리고 호수공원을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 구경을 하는 보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우리는 하얀 눈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멈춰 숨을 몰아쉬기를 몇 번을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와 눈 때문에 눈이 부셨고 하얀색 털을 가진 보미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 자체로 빛나는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연휴 첫날, 아침 산책은 나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줬다. 밤새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는 것만 즐거운 게 아니구나, 이런 호젓한 재미도 있구나. 10대와 20대를 보낸 대구를 떠나 작은 소도시에 살게 되었고 특별한 날에는 친구가 더욱 그리웠다. 추억이 있는 거리와 장소가 떠오를 때마다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근에 금주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금주’가 아니라 ‘노력’이다. 기껏해야 일주일 남짓 참다가 술을 마셔버리기를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금주 일기를 쓰며 나 자신을 호되게 야단을 치고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애주가도 아닙니다, 한 번에 맥주 두 캔 정도의 보잘것없는 주량입니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연인처럼 술과 나는 지금 그런 상태다.

   

끊으려는 이유가 있다. 술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마실 수 있다.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지난한 시간을 참아내야 한다. 글 쓰는 일, 운동,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 어느 것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한 번 맛있게 마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다음 날도 술이 생각났다. 한 번은 4일 연속으로 술을 마시고 무기력이 찾아왔다. 금주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글 쓰는 일도, 운동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기더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깨버릴 결심이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은 자신과의 약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간 계약서도 없고 청탁도 아닌 글을 혼자 쓰는 일은 등대도 없이 항해를 하는 것과 같다. 오늘 당장 그만둬도 아무도 모르고, 오로지 나와의 약속이고 결심일 뿐이다.    


힘들지만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뿌듯하고 내가 한 톨만큼은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순전히 나를 위해서 하는 거다. 금주도 그렇다. 나 자신을 조금은 믿고 싶어서 시작했다. 학원을 운영할 때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학원버스 노선을 짜야했고 학부모 상담을 해야 했고 회의도 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고 할 수 있다. 여기다 술까지 마시겠다는 건 염치없는 생각이고 하나쯤은 포기하는 게 맞다.    


‘소확행’의 창시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작은 것에도 감사함과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생활과 어떤 일을 통해서 꾸준히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코로나 19가 없었던 지난 크리스마스도 항상 즐겁기만 한건 아니었다. 현재가 불만스럽다보면 과거를 무턱대고 미화를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내일은 항상 처음처럼 흥분하는 보미와 아침 산책에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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