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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13. 2021

정정당당하게 한 장씩

나는 초밥이에게 산악회 가짜 아버지가 장어덮밥을 사줬는데 맛있더라며 이번 주 내로 한번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초밥이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내일 만들어줘.”

“마트에서 장어를 사다놔야 내일 아침에 만들 수 있는데?”

“지금 가자.”

“지금?”     


그때는 밤 10시 30분이었고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초밥이 눈빛에서 강렬한 기운에 눌려 어쩔 수없이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가자마자 생선 코너만 갔다 오는 거야."

11시에 폐점하는 마트로 달렸다.




우리는 보통 오전 10시쯤 제대로 차려서 식사를 먹고, 오후 두세 시에 고구마나 떡볶이 같은 걸로 때웠다. 그래서 밤마다 봄동 전의 유혹에 시달렸을까? 겨울 내내 나는 밤마다 전을 부쳤다. 부침가루, 건새우가루, 물을 개어서 봄동을 살짝 적신 다음 두 개의 프라이팬에 동시에 부쳤다.

“정정당당하게 한 장씩이다.”

두 개의 접시에 각각 담긴 봄동전. 우리는 바쁘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와! 봄동 너무 맛있어. 내가 왜 이 맛을 이제야 알았지?”

초밥이는 한평생 세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봤다고 자부했던 사람이 늘그막에 새로운 요리의 맛을 알게 된 사람처럼 말했다.     


빠른 속도로 먹는 초밥이때문에 나는 주춤했고 내 것까지 내밀어야 했다. 초밥이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 접시로 뛰어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후라이팬에 있던 부침개 한 장을 초밥이 접시에 턱 하고 얹어줬다.

“와! 하나 더 있었네?”

“한 포기에 세 장이 나오더라고.”     




그렇게 봄동만 먹던 초밥이가 장어 얘기에 꿈틀거린 걸까?

마트의 생선 코너는 텅 비어 있었다. 고등어 꼬리조차 없었다. 너무 늦게 간 탓인지 코로나 때문에 물량 자체가 적어서인지는 모르겠다.     

“나 이거 사도 돼?”

초밥이가 프랑크 소시지를 들고 있었다.

“응, 먹고 싶은 것 골라.”


초밥이와 대형마트에 온 게 일 년도 넘은 것 같았다. 초밥이도 용돈에서 얼마 떼서 사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사고 싶기도 할 것 같았다.

“이거는?”

초밥이 손에는 인스턴트 전복죽이 들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용량 소시지가 있길래 물었다.

“이게 더 양이 많은데 이걸로 할래?”

“아냐, 많이 먹으면 살쪄.”     

너의 인내심을 나에게 다오.


나는 오랜만에 맥주를 마셔볼까, 하고 세계맥주가 있는 코너로 갔다.

“엄마는 천 원짜리 필소굿 마시잖아.”

그렇지. 하지만 오늘은 흑맥주를 마셔봐야겠어.”

그게 뭐였더라, 언젠가 먹었던 진하고 쌉싸름한 맛이 나던 흑맥주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고 계산대로 갔다.     


하지만 집 앞 편의점에서 기네스 맥주 4캔을 사버렸다. 어차피 오늘 밤은 틀려버렸고 이제부터 파티다. 초밥이가 전복죽을 먹겠다고 해서 나는 전복죽을 데우고 봄동을 부쳤다.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틀고 초밥이와 나란히 앉았을 때였다.


"나는 엄마가 가끔은 막살았으면 좋겠어.”

“그래? 엄마 막사는 거 잘해.”

나는 보란 듯이 맥주 캔을 호기롭게 까서 한모금 죽 들이켰다. 뭐지? 그때 먹었던 게 이게 아닌가? 맛이 밍밍했다. 다시 마셔 봐도 마찬가지. 오늘은 봄동 부침도 나를 배신했다. 시계는 12시로 향해가고 있었고 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맥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한 시절이 끝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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