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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8. 2020

갈치속젓과 머스터드

“어제 엄마가 미안해.”

“아냐, 내가 미안해.”    


어제 키보드를 닦는데 갑자기 한글오피스 상단에 있는 리본 메뉴가 사라졌다. 그렇다, 전원을 켠 상태에서 키보드를 닦는 무모한 인간이 바로 나다. 더 큰 문제는 화면에 두 페이지가 나온다는 사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화면을 확대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놈의 확대가 안 되는 거다(아마도 나만 안 되는 거겠지만). 전자기기와 나는 숙명적으로 가까울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한 순간. 이럴 때마다 SOS를 치는 강에게 하소연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이건 노트북을 직접 봐야 될 문제 같았다. 그렇다면 강의 집보다 가까운 서비스센터에 가는 게 맞을 것 같았고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게 미치도록 신경이 쓰이는 거다. 하루 종일 노트북을 몇 번을 켜고 껐는지 모른다. 아, 곧 수업 시작인데.    


“초밥아, 빨래 좀 걷어.”

“아, 왜... 나 곧 수학가야 하는데 쉬게 해 줘.”

“엄마 빨래 가지고 올게.”

바구니에 빨래를 넘치도록 욱여넣고 왔는데 나무늘보로 빙의한 초밥이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베란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아직 베란다로 도착하지 못한 초밥이를 보고 나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나가! 내가 할 테니까.”    


이것이 어제 일어난 '빨래 사건'의 전말이었다. 밤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내 침대에서 같이 귤을 까먹지도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집 근처에 있던 서비스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안내를 받았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어제와 같은 번민에 휩싸일 것 같아서 초밥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우유랑 고구마 먹고 있어. 엄마 노트북 고치고 갈게.”


아침 식사를 건너뛰기로 하자 놀랍게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전한 서비스센터로 가서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5분 만에 내 이름이 호명이 되었고 기사님이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나를 불안하게 했지만 결국 고치는 데 성공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요즘, 산책과 글쓰기 덕분에 나는 그나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학교와 분담하던 아이의 교육과 먹거리가 온전히 내 몫이 되자 나도 모르는 새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아도 아이가 온라인 수업하는 것을 봐야 하고 매 끼니와 간식을 챙겨주는 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딸이 먹고 난 귤껍질, 음료수 컵을 치우면서 내 안에 화도 조용히 쌓여갔다.    


의욕이 넘치던 아이가 시무룩해지고 매사에 시큰둥해지는 걸 보고 학교 가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 자극을 받고 성장을 해야 할 시기에 이렇게 갇혀있으니 아이가 시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 훈제오리로 점심을 차렸다.

“어제 일은 엄마의 100퍼센트 짜증이었어. 사실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아무것도 못했거든.”

“어떻게 고장이 났는데?”

“사실 고장은 아니었어. 기사님이 ‘한컴 기본 설정’을 초기화하니까 해결돼버렸거든.”    

나는 죽었다 깨도 ‘한컴 기본 설정’을 초기화할 생각은 못했을 거고 서비스센터에 갈 생각을 한 것만 해도 스스로 장하다고 생각했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수리비도 안 나왔고 칫솔 세트 선물도 받았어. 코로나 때문에 주는 거래.”

“코로나 때문에 왜?”

글쎄.

“엄마 입 냄새 나는 거 알았나 보다.”    


잃어버린 일상 때문에 힘든 시간이지만 그래도 함께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고기를 갈치속젓에 찍어먹는 나와 머스터드소스에 찍어먹는 딸은 이렇게도 달라서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사과하고 화해하면서 계속 서로를 지켜주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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