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Jun 01. 2021

처음으로 교복을 입은 딸을 볼 때

뿌듯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복잡한 엄마 마음

우리 집 넷플릭스 보는 방법은 노트북을 식탁이나 침대에 놓고 먹으면서 보는 거다. 금요일 밤 치즈를 올린 닭발을 앞에 두고 나는 맥주, 초밥이는 주스를 마시면서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시작했다.      


평소처럼 초밥이와 마주 보지 않고 이때는 옆에 나란히 앉았는데 맥주 때문에 나도 모르게 트림이 나왔다. 초밥이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싫은 티를 냈지만 이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맥주 한 모금에 한 번씩 그게 나왔나 어쨌나 그런 모양이었다. 그랬더니 정말 싫다는, 정확히는 더럽다는 표정과 행동을 하는 녀석을 보는데 울컥 서러움이 올라왔다. 나는 네 똥 기저귀까지 갈았다는 말은 다행히 하지 않았지만 늙어가는 게 서러운 건지, 생리현상이 내 의지를 벗어나서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에게 말로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막걸리와 순대, 초밥이는 주스와 만두

다음 날 딸의 교복을 맞추러 갔다(기성복이라 사이즈를 고르는 거지만 교복은 아무래도 맞춘다는 말이 맞지 싶다). 재킷과 치마를 입은 딸을 보자 언제 이만큼 컸냐 싶은 게 뿌듯한 게 아니라, 벌써 내가 이렇게 늙었냐 싶어서 이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뿌듯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아무튼 내 마음 나도 몰라하는 심정으로 딸이 동복, 하복을 입는 걸 지켜봤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처음 입어보는 교복에 설레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 기대에 차있는 한 인간에 대한 순수한 부러움이었다.      

나는 오징어로 나와도 딸 사진을 찍어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


한 번은 과외를 하는데 초밥이가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웃음 섞인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시끄럽다고 하자 곧 잠잠해져서 전화를 끊었나 보다 했는데 수업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보니 녀석은 전화통을 붙든 채 붙박이장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아, 또 뭔가가 시작되었구나.     


초밥이는 7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태권도, 이후 일 년 반 동안 킥복싱, 현재는 주짓수를 하고 있다. 주짓수 도장에서 자기가 여자 중에 에이스(꾸준히 다니는 여자회원은 초밥이밖에 없다)라며 몇 달 뒤에 있는 대회도 나갈 거라고 했다. 지난겨울 폭설이 쏟아진 날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가는 바람에 동상이 걸릴 뻔한 적도 있다. 맨발 투혼이 따로 없다.      


초밥이는 도장을 다녀오면 도복은 옷걸이에 걸어서 베란다에 말리고, 도복을 주말에 빠는 게 아니라 내가 빨았는지 확인한다. 아빠한테 갔을 때 나한테 전화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도복을 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내가 도복을 빨았을 때 딸은 칭찬을 해준다


주짓수라는 운동의 장점이 많겠지만 그건 내가 안 해서 모르겠고, 나는 주짓수 도장에 오빠들이 많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어떤 오빠는 수줍어하는 게 귀엽다는 둥 어떤 오빠가 자기한테 사탕을 줬다는 둥 하는, 그래 봐야 중학생밖에 안 되는 오빠들 얘기를 한참을 듣던 내가 기술 같은 건 안 배우냐고 물으면 초밥이는 “그런 것도 한다”라고 했다. 그 오빠들을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고, 조르고 메다꽂고 별 거 다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결국 한 (눈먼) 고등학생 오빠와 썸을 타기 시작한 거였다.    

 

“통화 다했냐?”

“오빠가 수업 시작했데.”

“학교에서 전화한 거였냐? 공부는 안 하는 고등학생이군.”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내 귀에는 안 들려.”

(그러시겠지)

“엄마 나 사귀는 거 허락해 줄 거야?”

“사귀지 말라고 하면 몰래 사귈 거 아니냐?”   

  

붙박이장에서 발견된 며칠 뒤였다.

“잘 돼 가냐?”

“그 오빠 좀 짜증 나.”     

그 오빠는 음성 알을 무척이나 아껴서 초밥이한테 문자로 “지금 전화해”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무슨 고등학생 오빠야가 몇 달 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애한테 빌붙는 거냐고, 사귀기도 전에 그런 식이면 만나기라도 하면 밥이며 뭐며 다 사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고, 눈꼴시러웠는데 마침 잘됐다는 심정으로 신나게 떠들었니 초밥이 얼굴이 싸늘해지면서 입을 앙 다물었다.     


그 뒤로는 “요새도 전화는 네가 하냐?”라고 물으면 녀석은 “말 안 해 줄 껀데”라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하정우)이 있지만, 그 사람과 만나는 길은 해킹밖에 없는 엄마가, 생물학적 기능밖에 남지 않은 엄마가 궁금하다는데 좀 얘기해주면 안 되나.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도덕 시간에 배우는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