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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pr 02. 2021

분희 언니

아빠는 분을 못 이겨서 이놈의 자식 들어오기만 하면 오락실 가는 몹쓸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며 막대기를 찾아 마당을 빙빙 돌았다. 아마도 내가 오빠를 찾으러 나갔을 테고 그런 날 우리 집은 거센 풍랑을 맞은 돛단배 처지가 된다.   


나는 가끔 분희 언니가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 집에서 편하게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도 많은데 어째서 자기는 작은 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하고 술만 먹으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아버지도 모자라 작은 아버지 집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지. 언니는 억울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할아버지가 무능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생계에 대한 불안이 커. 그런 불안으로 우리를 대하는 건 결국 우리의 유산이겠지.”     


이렇게 말하는 언니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거친 말과 행동 뒤에 숨은 그 사람의 두려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준정이 너는 손톱이 예쁘니까 너무 바짝 깎으면 안 돼. 이 정도로 여유를 두는 거야, 알았지?”


당시 나한테 누구도 이렇게 보드랍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언니는 삭막한 내 마음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대학교 1학년일 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우리는 12살 차이였다. 어른들은 우리가 얼굴도, 하는 행동도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언니처럼 반듯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니와 같이 산지 2년이 지났을 때, 큰아버지와 아빠가 돈 문제로 크게 싸우는 바람에 언니가 따로 방을 얻어서 나가게 되었다. 내 마음에 불을 밝혀준 언니를 잃는 슬픔은 컸지만 내 마음 따위에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방학이 되면 언니와 함께 큰집에 갈 수 있었다. 언니가 나를 데리러 오는 날 나는 아침부터 목욕하고 가방을 챙겨놓은 다음 대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언니가 오지 않았던 그 여름의 길었던 낮이 기억에 선명하다. 해가 길어지다가 저녁으로 넘어가는 동안 서러움이 나를 가득 채웠다. 온전히 어떤 한 사람을 기다리기만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즈음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언니를 보고 나는 왈칵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맘 놓고 울지도 못했다. 분희 언니가 사촌언니이기 때문에 우리 언니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표현하지 못한 그리움이 쌓여가다가 언니가 강원도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어이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이 터지고 말았다. 

    

“거기서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영영 안 올 거잖아.”

나는 울먹거리면서 말했지만 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얘는, 내가 일 하러 가지, 남자 만나러 가냐?”

언니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기대에 들떠서 언니를 보내기 싫은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 예언대로 이년 뒤에 언니는 충남 공주가 고향인 형부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나는 큰엄마한테 언니의 소식을 간간히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나는 언니 또래의 여성을 보면 늘 언니를 떠올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실감은 커졌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40대, 50대가 되어서 다시 만났다. 언니는 공주, 나는 군산에 살고 있어서 차로 한 시간을 달리면 만날 수 있었다. 분희 언니는 여전히 우리 언니였다. 내 안의 특별한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 

     

내가 언니가 있는 공주로 갔고 우리는 공주산성을 산책하는 동안, 커피숍 야외 테라스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근원적이면서도 경계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른들한테 칭찬받으려고 했고, 커서도 줄곧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살았던 것 같아.”

어떤 얘기 끝에 내가 한 말이었다.

“칭찬받고 싶은 마음, 그랬겠지. 하지만 그 속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선한 마음이 너한테 있었어.”

언니가 내 눈을 보며 그 얘기를 했을 때, 순간 나는 멈칫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참지 않고 흐르는대로 내버려 뒀다.

    

차가웠던 할머니 눈에 어떻게든 들고 싶어서 온갖 아양을 떠는 나를 보고 고모는 ‘여시’라고 했고 삼촌은 ‘영악하다’고 했다. 눈치 빠른 나 때문에 오빠가 아빠한테 더 혼나는 거라고 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나한테 상처였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인정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느라 내 마음은 겨울 들녘에 마른 가지처럼 바짝 말라있었고 아무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가 특별히 나를 예뻐해서가 아니었다. 언니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고 가까이만 있어도 따뜻함이 전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기운이 필요했고 그런 힘을 받아서 조금은 더 큰 사람으로 자라고 싶었다. 그건 생명이 태양으로 향하듯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의 네 생명을 이루는 네 안에 있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어.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어.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데미안>에서 술집을 드나드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해주는 말이다.

     

내가 갔을 때 마침 언니가 책을 정리한다고 쌓아뒀길래 내가 달라고 해서 가지고 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언니를 많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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