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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pr 16. 2021

가성비 갑인 아침 메뉴

브런치에서 간장계란밥의 레시피가 소개된 글(은퇴 부부의 아침밥상)을 읽고 아침에 한번 만들어봤다. 버터, 계란, 밥, 간장을 넣고 볶기만 하면 끝이었다.     


"맛있냐?"

"어, 완전."     


초밥이의 전투적인 숟가락질을 보며 여태 나는 뭘 한 건가 싶었다. 정신없이 국 끓이고 생선 굽고 나물을 무쳐도 딸은 내가 떠준 밥을 밥솥에 반을 덜고 와서 두 세 숟가락을 먹고 다 먹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볶음밥에는 꽤 많은 밥이 들어가서 초밥이는 평소보다 세 배쯤 많은 밥을 먹었지만 만족한 눈치였다. 가성비가 좋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간장계란밥을 도시락으로 싸고 커피도 내려서 텀블러에 담았다. 오렌지와 책도 두 권 챙겼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였다.     


딸이 다니는 중학교 옆에 산이 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산 옆에 학교가 있는 건가? 월명산 근처에 있는 월명중학교를 가려면 버스로 1시간이 걸리지만(버스 배차 간격이 크다), 배정 소식을 들었을 때 무턱대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건 월명산 때문이었다. 학교라면 자고로 산을 끼고 있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정기를 이어받고 기상을 드높일 산이 없다면 교가는 뭘로 만든단 말인가.     


초밥이를 데려다주고 산을 오르는 건 나의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한 번은 못 보던 등산로를 발견했다. 출근해야 했던 시절이라면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시간 부자가 아닌가. ‘거 뭐 올라가 보지 뭐’ 거칠 것이 없다. 이건 마치 코트 두 개 중에 뭘 살까 하다가 “둘 다 주세요” 했을 때처럼 호탕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런 시절이 있었나, 뭔가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고 돈과 시간은 어째서 늘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지 조금 우울해졌다.     


매일 가는 산이라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서는 약간의 호기심과 긴장감이 생긴다. 그 기분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시간이 많은 건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그러다 ‘그곳’을 발견했다. 군산에서 서천으로 이어지는 동백 대교가 한눈에 보이고, 그 앞에는 하트 모양 그네가,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둘레에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벚꽃이 드리워진 모습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곳. 그날 나는 아늑하고 양지바른 여기에 다시 올 때는 도시락과 커피를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초밥이가 일주일 온라인 수업이 끝나고 등교하는 월요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시간이 넘쳐나는 나는 주말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계획이란 세우는 즉시 바로 실천하는 맛이지, 호기롭게 집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우산 갖고 나올걸.”

“난 괜찮아.”

“아니 나 말이야.”

딸이 아니라 자기가 산에 가야 되는데 비 온다고 걱정하는 엄마를 초밥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도시락을 싼 게 아까워서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얼마 걷지 않아서 역시 오길 잘했다 싶었다. 꽃비가 내리는 걸 보는 순간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버렸다. 꽃과 비가 섞인 진짜 꽃비. 벤치는 나뭇가지가 비를 막아줘서 다행히 젖어 있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으려니까 새소리가 정말 많이 들렸고 마치 자기가 주인이라고 나한테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벚꽃이 내려앉은 의자에 도시락을 펼치고 새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천천히 밥을 먹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었고 잔잔하게 채워지는 기쁨을 느꼈다.  

   

나는 호텔 조식을 좋아했다. 한 호텔의 조식을 먹기 위해 3년간 여름휴가를 같은 호텔에서 묵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내가 정한 조식을 맛있게 먹는 법이 있는데,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1시간 정도 운동을 하는 거다. 그리고는 객실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식당에 가는 건데, 이때 머리카락은 다 말려서는 안 되고 화장도 하면 안 된다. 옷은 최대한 헐렁한 것으로 입고 반드시 조리를 신어야 한다.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이 좋았다. 화려한 레스토랑에 그런 차림으로 있는 것만큼 일상을 벗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었다.

    

휴가라고 특별한 걸 하기보다 평소 내가 하던 것들을 여유 있게 하고 싶었다. 이따 처리해야 하는 일을 머릿속으로 꼽지 않고 운동을 하고 싶었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먹고 출근해야지’가 아니라 제대로 식사를 즐기고 싶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일상이었다.      


일어나서 아침 공기에서 그 날, 그 계절에만 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기를 바랐다. 특별한 음식이 아니어도 내가 장을 봐서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와 지금은 2만 원짜리 딸기를 사도 바빠서 시든 후에 먹거나 처음보다 반값으로 내려간 딸기를 사서 먹는, 딱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돈과 시간을 둘 다 가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딸기는 바로 사서 먹는 게 최고지싶었다.


산을 내려올 때는 비가 그쳤다. 비 온 뒤라 공기는 신선하고 햇빛은 쨍하는 소리가 날만큼 눈부셨다. 단단한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서있는 지금을 기억하고 싶었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기운을 내 속에 차곡차곡 쌓고 싶어서 흙을 밟고 잎사귀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했다. 그냥 사는 게 좋다는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보면 좋은 글도 나오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먹고 살만큼 돈도 벌겠지, 막연하게 믿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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