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은 딸의 생일이다. 어버이날이 생일이라는 게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키는지 2008년 5월 8일에 나는 알지 못했다.
해가 거듭할수록 어버이날보다 자기의 생일의 위상이 올라간 딸은 작년부터 카네이션은 생략하고 생일 선물을 뭐 사줄 거냐고만 물었다. 급기야 올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먼저 전화해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사를 듣는 딸을 보고서야 나의 경솔한 선택(제왕절개)을 후회했고 앞으로 남은 어버이날들을 어떻게 보낼지 아득해졌다.
딸 방에서 학교에서 만든 카네이션을 찾아냈다
남자들의 군대 얘기와 비슷한 게 여자들 사이에서는 애 낳는 얘기가 아닐까. 들어보면 쉽게 낳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날 자모 모임에서도 어쩌다 애 낳은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눈치챈 주영이가 물었다.
“언니는 왜 말이 없어? 혹시 수술한 거 아니야?”
자연분만이 어째서 군대 현역을 나온 사람처럼 당당하고 제왕절개는 방위를 나온 것처럼 기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국방의 의무와 출산의 고통을 똑같이 짊어진 동포로서 이런 식의 위화감은 이 땅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분만을 고집하다가 자칫 산모와 아기가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자연분만 가능한데 왜 수술하려고 해요?”
담당 의사가 말했다. 그렇다. 내게는 수술을 해야 하는 명분이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 무서웠다. 전날 밤부터 진통이 살살 와서 병원에 입원해서 다음날 오후 6시까지 누워있는데 드라마에 봤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만큼의 고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두려웠다.
임산부 요가는 또 얼마나 열심히 했나 모른다. 오후에는 요가학원, 오전에는 문화센터에서 하는 요가를 했다. 자연분만에 성공하자는 말을 구호처럼 외쳤는데 막상 디데이가 되자 도망가고 싶었다. 초중고 12년 동안 조퇴 한 번 한 적 없는 내가, 체력장만 했다 하면 1등급을 받은 내가, 매달리기에서 픽픽 떨어지는 애들 사이에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철봉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내가 애 낳는 것만큼은 무서웠다.
이왕에 배 짼 얘기를 한 김에 수술 중에 겪은 심리적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제왕절개를 한 이들을 대변하는) 사명감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지만.
수술실에서 나는 마취를 하고도 정신이 깨어있어서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저, 잠깐만요, 마취가 안 되었어요.”
“이거 국소마취입니다.”
그때부터 내 영혼과 육체는 누더기가 되었다. 수술실에는 간호사와 의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눈으로는 ‘기술자’라는 분이 내 배 위에 올라타서 아이를 아래로 미는 걸 보고 귀로는 사각사각하며 배를 자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고 있었지만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의 앨리스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해서 이 모든 장면을 묵도하는 기분.
현실이 아닌 세계의 문을 열어버린 것 같았다. 차마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보여주고 젖을 물려주는데 말이 안 나오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았으니 아이 잘 키우고 살겠습니다, 누구인지 모를 대상에게 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아침부터 출근하는 복장으로 핸드백까지 메고 나간 초밥이가 저녁 7시에 전화가 와서 “친구들과 집에 잠깐 들러도 되냐”라고 물었고, 곧이어 친구 4명과 함께 들이닥쳤다. 나는 “너네 무슨 조직이냐?”라고 물었더니 녀석들은 까르르 웃더니 케이크에 초를 꽂고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 생긴 게 왜 태어났니”를 부르더니 30분 만에 썰물처럼 몰려나갔다.
그동안 안방에 감금되어 있던 나는 초밥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간 거냐?”
“카페”
“대학생이냐?”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서 김에 밥을 싸 먹고 있으니까 초밥이가 빡빡한 생일 스케줄을 마치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돌아왔다. 녀석은 하정우처럼 김을 먹고 있는 나를 쓱 한번 보더니 엄마를 위해 일부러 1+1으로 산거라며 마스카라 하나를 내밀었다. 급조한 티가 역력했고 마스카라를 한지가 언젠지 기억은 안 났지만 일단 받아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