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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29. 2021

사기와 응원

우리를 속이는 것들


국민 은행 광고를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지난번에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파트고 그건 남자가 준비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한 남자가 울음을 터트리는 걸 연출하더니 이번에는 아이를 키우는데 아기 방과 비싼 카시트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국민은행은 서른이들을 응원합니다”라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광고처럼 남자가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사면 이자를 내기 위해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고 아이를 낳으면 육아비까지 추가되어서 갑갑한 현실에 묶이는 것 아닌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무나 대출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이자를 잘 낼 사람인지 판단하고서야 대출을 해준다. 호의가 아닌 장사일 뿐.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면 대출은 가차 없이 거절한다. "사람을 가려서 응원한다"     


사업자 대출을 받은 게 있었는데 학원을 폐업하자 바로 상환을 해야 했다. 기간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은행 담당자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다른 대출도 되는 게 없었다. 전에는 호의적이었던 은행 직원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어서 그 냉정함에 놀랐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경험을 글로 쓴 적이 있었다. 소설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한 후에 집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직원이 불안정한 직업 운운하며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결혼에서 아파트가 중요하고 그걸 남자만 고민하는 광고 속 설정이 우리를 낡은 관습에 가두고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내가 나의 기준을 갖지 못한 것도 이런 광고와 TV를 보면서 막연히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방, 비싼 카시트, 아파트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닐까. 정작 아이는 자기 방이 있는지, 카시트가 얼마짜리인지 알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아이를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키우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삶의 끝이 뭘까.

아파트 때문에

     

아빠는 신축 아파트 31층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지금은 25년 된 아파트 9층에 살고 있는데, 오빠가 분양받은 그곳은 45층 주상복합단지라고 했다. 아빠도 그렇게 높은 곳에 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팔면 손해가 크다는 오빠의 말에 딱 1년만 살겠다고 했다.     


"아빠한테 1년은 우리와 다르잖아요."

내 말에 아빠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전원주택을 짓지 않고도 농가주택을 깨끗하게 수리해서 흙을 밟고 사시면 좋을 거라고 내가 말했을 때 아빠도 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늦었다고 했다.    

 

월명산 근처에 ‘연세 220만 원’ 주택 세입자를 구하는 광고가 있어서 아빠한테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년세 220만원


“옛날에 우리가 살던 그런 집이에요. 이런 곳에서 아빠와 엄마가 매일 뒷산에 산책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가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영원히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빠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걸 안다.     

이 집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아빠는 일주일에 두세 번 나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할 때마다 보통 한 시간이 넘는다. 아빠 얘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빠가 펌프를 개발했던 이야기. 두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한 번만 더 시도해보면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그때, 겨울에 마루에 이불을 깔고 자는 나를 보고 아빠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우리 집은 방 두 개에 마루가 있었던 흔한 주택이었는데 6학년이었던 나는 오빠와 한 방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방이 없어서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고 마루가 있으니까 거기서 자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는데 아빠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아이들이 이렇게 커버렸구나, 내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개발하던 일을 다 정리해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옆 동네의 20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내 방이 생겼고 수세식 화장실도 생겼다. 마당이 아니라 욕실에서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뒤에는 30평대 새 아파트에 분양을 받아 이사를 갔다.     


하지만 도돌이표처럼 아빠가 펌프 이야기로 돌아오는 걸 보고 아빠 마음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아빠가 원하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일에 대한 성취욕이 큰 아빠는 단순 가공보다는 자기가 개발한 제품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결국 그것 때문에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빠를 못마땅해하는지 모른다.      


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일을 스스로 단념했던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조차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아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 가족들을 위해 사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한 아빠를 요양병원에 있게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빠 인생에 작은 위안을 마지막에는 누리기를 바란다.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던 아빠는 보훈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나는 보훈병원에 전화를 해서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이 가능한지 알아봤다. 아빠의 황폐한 마음을 돌보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 세고 남의 얘기를 듣지 않는 아빠를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걱정만 하기보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적어도 아빠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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