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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Sep 26. 2021

우리 형아는 서울대갈 거예요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조카가 둘 있다. 오빠의 아들로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이다. 첫째는 원주율표를 소수점 45자리까지, 화학원소를 40개를 외울 정도로 인지 지능이 높고 학원도 선행반, 심화반으로 중학생들과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손주를 할아버지가 기특해하는 건 당연했다.     


“우리 형아 진짜 똑똑해요. 형은 서울대 갈 거예요.”

나는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둘째를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헌이(둘째)는 형과 다른 면에서 재능이 있다. 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서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이번 추석에 할아버지가 보미(강아지)를 훈련을 시켜서 사람이 먹는 걸 달라고 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자 헌이가 중얼거렸다.


“개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음식을 걱정하는 건가?”

강아지가 입을 댄 음식을 사람들이 먹을까 봐 걱정하는 할아버지 마음을 아는 거였다.

    

조금 후에 오빠가 담배를 피우고 오자 헌이는 오빠 몸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아빠 담배 피우고 왔어? 아빠 담배 끊으면 안 돼?”라고 하더니 마음에 걸리는지 놀다가도 두 번을 더 말했다. 나는 조그만 녀석이 제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예뻐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헌이가 아빠 건강이 나빠질까 봐 걱정해서 그러지? 주기율표 외우는 것보다 아빠를 생각하는 헌이 마음이 더 소중해.”     


오빠네 식구들이 돌아가고 아빠는 첫째가 외운 게 뭐냐면서 그건 언제 배우는 거냐고 물었다. 내가 중학교 때 배우는 거라고 하자 아빠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내가 아빠가 첫째를 뿌듯해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게 아니다. 첫째의 재능은 앞으로 성적을 통해서 쉽게 드러나지만 헌이가 가지고 있는 건 부모가 발견하고 칭찬해줘야 나도 형과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구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다. 헌이가 열등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이유다.

   

‘똑똑하다’를 가리키는 건 이제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아는 것이 많고, 지필고사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을 똑똑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공감능력, 창의력이 높은 학생을 똑똑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잘 포장된 길을 가장 빨리 가는 걸로 경쟁을 했다면 이제는 각자의 길을 만들어서 끝까지 가는 힘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빨리’가 아니라 ‘끝까지’ 가려면 필요한 게 다르다. 100미터 달리기와 지리산 종주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100미터 달리는 오직 앞만 보고 전력질주를 해야 하지만 지리산 종주는 스스로를 믿는 힘과 함께 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혼자 나선 길에서 어느새 동행이 생기는 걸 보면 멀고 힘든 길일수록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사람들과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든 걸 잊어버리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공감능력이 큰 사람이 삶이라는 긴 여정을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과외를 하는 현준이는 비록 계산 실수는 많지만 실생활 통합형 문제는 신통하게 풀어냈다. 두 변수의 상관관계를 해석하는 단원이었는데 설명 하나 없이도 척척 풀었다.

“현준이는 시야가 넓은 것 같아.”     


수현이는 “네”라는 말 안에 늦어서 죄송해요, 숙제를 다 못했어요, 피곤해요, 잠 와요, 라는 말을 다 집어넣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 아이다. 이 아이에게 감탄사는 숨 쉬듯 터져 나오고 그것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천 개의 “네”와 천 개의 “아”를 가지고 있었다.

“수현이는 성우나 배우 같은 걸 하면 좋겠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아이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른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들은 아이를 바꾸려고 하기보다 발견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스쳐가는 많은 선생님들 중 한 명일뿐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눈이 밝은 어른이면 좋겠다.

    

언젠가부터 내가 아이한테 장애만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성장시키거나 좋은 영향만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아이가 가진 본연의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건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의 생명의 등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그 등불을 키워가는데 내가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렸을 때 막내 이모는 “얘 손가락을 봐봐. 길고 예쁘지 않아?”하고 식구들에게 말하거나 유치원에서 배운 걸 해보라고 하고 박수를 쳤다. 신혼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예쁜 밥그릇을 사줬고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는데 "아이스크림 먹을래?"하고 물었다. 어쩌면 이모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그 일들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삶에서 소중한 건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의 고마움은 더욱 커지고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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