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31. 반야봉
밤에 산을 오르면 눈에 뵈는 것도 없다. 춥고 서글픈 그곳에서 멈춰 쉴 수도 없어서 빨리 오를 수밖에 없다. 직전마을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해서 일출시간은 6시 47분까지 오르막길 8.7킬로미터를 올라야 했다. 반야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인데 내가 가능할까? 희남이 삼촌은 가능할 거다. 희남 도사는 뭐든지 가능하니까.
반야봉을 0.8킬로미터 남은 지점에서 일출이 시작되고 말았지만 단풍과 아침놀에 그윽하게 물든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다. 어제도 떠올랐을 저 해는 마치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것처럼 몸을 불사르고 온 세상을 품어주었다.
여행을 가고 싶었다. 토요일 수업이 마치는 대로 출발해서 월요일 5시 수업 전에 돌아오면 이박삼일도 가능했다. 지리산 산행 후에 들르던 구례 ‘산수골 황토방’의 뜨끈한 아랫목이 그리웠고 코로나를 잘 견디고 계신지 사장님 안부도 궁금했다.
여행지를 고르다가 문득 6년 전에 갔던 오래된 한옥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떠올랐다. 예전 집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은 낮은 지붕에 방도 작았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작은 마당 건너편에 있었다.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고쳤다고 하면 맞을 그런 곳이었다. 손님은 많지 않아서 그날 숙박객은 나와 한 커플이 다였다.
계절은 초겨울이었고 조금 음산한 기운이 도는 그곳에 짐을 풀고 낯선 골목을 걸었다. 적당한 곳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동네 사람들만 갈 것 같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마트에 들렀다. 과일과 군것질 거리를 사고 포인트 적립을 하겠냐는 점원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하고 오늘 하루 나의 집인 곳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아서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길을 걸어 허름한 여인숙 같은 곳에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떤 이유로 낯선 도시에 집이 아닌 방을 구해 이불 한 채로 시작하는 살림 같았다.
그 기분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파도에 떠밀려 왔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는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그래, 주인공. 평탄하게 사람이 아닌 굴곡진 삶을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지 않나. 무언가를 잃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생각났고, 그런 장면에 어울릴만한 방이었다. 세간은 단출했지만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느낌이 그랬다.
생경한 그 감정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한동안 혼자 여행을 많이 갔다. 비용은 이만 원 정도의 숙박비, 식비, 기름값이면 충분했다. 관광지가 아닌 조용한 작은 도시의 낯선 길을 걷고 처음 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곳을 친숙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었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한 게 아니라 ‘충분하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낯설다'라는 것 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등산도 충분하다와 낯선 감각을 기르기 위해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원하는 게 자꾸만 늘어날 때 힘든 산행을 계획한다. 날이 추워지면서 아침 기상 시간도 자꾸 늦어져서 한번 조일 때가 되었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두 달을 등산을 쉬었다. 집 근처의 월명산과 청암산은 일주일에 몇 번씩 올랐지만 등산을 시작하고 장거리 등산을 이렇게 오래 쉰 적은 처음이었다. 희남이 삼촌과 지리산 아빠가 일요일에 일을 해야 했고 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하는) 핑계도 한몫했다.
브런치 공모전 마감날, 나는 등산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희남이 삼촌이 혼자 천왕봉 일출 산행을 하고 사진을 올렸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다음 주에도 일출 산행해요.”
그렇게 반야봉 일출산행을 하게 된거다.
반야봉에서 내려와서 삼도봉에서 밥을 먹었다. 6시간 산을 타고 먹는 밥은 달았다. 다시 직전마을로 하산하는데 잠이 쏟아져서 임걸령에서 십 분쯤 배낭을 베고 눈을 붙였다. 그만해도 한결 몸이 개운(?)했다. 피아골 계곡은 오를 때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려갈 때는 무릎과 한 판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길도 마침내 끝이 보였다.
하산주는 직전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가 주차한 자리가 식장 주차장이라 미안하니까 그렇게 하자고 지리산 아빠가 말했다. 맨날 슈퍼에서 사 온 막걸리를 아스팔트 바닥에서 먹었는데 오늘처럼 번듯한 테이블에 앉아서 먹기는 처음이었다.
“비닐봉지에서 꺼낸 술을 먹다가 의자에 앉아서 먹으니까 이상한데요?”
내 말에 희남이 삼촌이 대꾸했다.
“그거야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지 뭘, 오늘은 여유가 있잖아.”
그때 시간은 오후 2시. 산행 시작하고 정확히 12시간 만이었다. 하룻밤 잠을 자지 않고 11시간 산행 후 찾은 여유라니. 고정된 시간 개념을 시원하게 부셔주는 등산이 좋다. 다시 세팅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