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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14. 2021

그가 하려던 건 이별식이었다

“야야, 학교에서 전화 왔는데 정모인가 뭔가 이번에 꼭 오라 카더라.”     


동아리 정모가 술을 마시는 핑계라는 걸 모르는 엄마는 굉장히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전화를 한 동아리 총무인 H를 두고 누가 모범생 아니라고 할까 봐 집까지 전화를 하냐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현실이 영화보다 특별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잘생기고 반듯하기로 소문난 H가 어쩌다 날라리로 명성이 자자한 나의 집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그 선배한테 또 전화 왔다. 함 받아봐라.”     


이번만큼은 정모에 나오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있는 H의 긴장한 얼굴을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같이 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친하지도 않던 H가 친구와 나(이인조)에게 애인이 없는 사람들끼리 뭉치자며 술을 사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도서관이 서식지인 선배와 학교 앞 술집에 살다시피 하는 나는 결코 한 팀이 될 수 없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예상대로 분위기는 어색했고 우리(이인조)와 선배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평소에는 논리적으로 말만 잘하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어설픈지 장단을 맞춰주느라 좀 힘들었다. 이 선배가 원래 이렇게 허당이었나? 오늘 같은 날 만나자고 하는 것도 그렇고 눈치가 없는 건가.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었다. 한편 H의 머릿속도 다른 이유로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추위와 수줍음에 한껏 상기된 얼굴로 H가 말했다.     


“곧 군대를 가야 하는데 미안해서 망설였어.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찾아왔어.”


크리스마스에 고백이라니. 나는 그의 말을 듣기도 전부터 이미 감격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거절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당연히 성공했고 그날부터 우리는 달달한 커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자동 연상으로 H가 생각난다. 나의 스무 살 크리스마스를 액자에 걸어두듯 특별하게 만들어준 선배에게 고맙다가 끝내 미안해지고 말지만.     



연락이 끊긴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커피숍에 앉아있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알 것 같았다.      

그가 하려던 건 이별식이었다. 그는 담담한 말투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이 없었고 어떤 질문이나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준비해온 말들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전하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마치자 나는 “알겠다”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뻔뻔한 줄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그가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도 군대를 가고 싶지 않았지만 군대를 갔던 것처럼 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잘못이라면 미숙해서 내 사랑을 지킬 힘이 없었다는 거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마지막 장면까지 액자로 남겨줬다. 신기한 건 액자를 꺼내 볼 때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생각이 든다는 거다.      


나는 부끄러웠다. 우리의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상처까지 담아 온 그에 비해 무책임한 내가  부끄러웠고 내 것이기도 했던 시간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했다. 내가 한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십 대 나는 지독하게도 외로웠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가족 중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고 제대로 집중하는 것 없이 학교로 술집으로 떠돌아다니기만 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의욕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지식도 부족했고 그걸 얻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무작정 그럴듯하고 화려한 일만 꿈꿨고 그걸 위해 하나씩 쌓아 나아가야 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랑도 그랬다.     


화려하고 폼나는 연애를 하고 싶었지만 진심을 알아보고 사랑을 지키는 일에는 무심했다. 입시 때문에 유예해왔던 욕구를 분출하느라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중심을 잃었고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잠시 그를 통해 얻은 안온함은 그가 군대를 가자 더 큰 빈자리로 남았고 나는 더욱 흔들렸다.


     


내 안에 깊은 곳과 마주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외로움도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하기보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 나의 외로움은 내가 껴안아야 한다. 서글픈 말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는 내내 텅 빈 구멍을 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나는 상처 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 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노>의 일부분이다. 과거에 잠식당하지 않고 새로운 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처 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기노는 출장에서 돌아와 회사 동료와 아내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곧바로 집을 나온 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기노는 다시 아내를 만나 사과를 받고 아내를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전에 자신이 회피했던 문제를 바라보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보면 나도 약간은 용기가 생긴다. 하루키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방금 읽은 페이지를 다시 읽어도 뻔하지 않다. 지극히 평범한 문체가 우리의 삶과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할 게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 다르고 새로운 것이 하루키의 소설과 비슷하다. 

    

이번에 나는 스무 살에도 외로웠다는 걸 알았다. 외로움은 나이 때문도 사람 때문도 아니다. 분명한 건 지금이 예전보다 외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건 내가 한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가 “잘 지내라”라고 말하고 돌아설 때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났다. 그에게도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그때 내가 그를 불렀다면 어땠을까? 

    

그때는 내가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 있지 못했어.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 그런 나를 원망한 적도 많았어. 오랫동안 편지를 가지고 있었어. 이제는 아무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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