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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3. 2021

무섭게 조는 청중 앞에서

군산 종합 노인복지회관에 강의가 있던 날이었다. 강의 시간은 1시였지만 어르신들은 30분 전부터 출석해서 꽂꽂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앞에서 노트북을 연결하는 나를 관찰하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나는 밖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더디게 시간이 흘러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1시가 되자 내 소개로 강의를 시작했지만 어른들은 15분이 경과되기가 무섭게 한 분씩 졸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부랴부랴 준비해 간 그림일기 폼을 나눠드리고 말했다.     


“오늘 감사했던 일을 그려주시고 밑에 글을 써볼게요.”     

어른들은 언제 졸았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그림에 색칠하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정성스럽게 쓰셨다. 그 모습을 보는데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순조로웠는데

“이웃에 사는 동생이 어디서 호박을 얻었다고 나를 하나 줬다.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챙겨주니까 고마웠다.”

“동생분 마음처럼 크고 먹음직스러운 호박이네요.”     


“올해 농사지은 쌀가마니가 아침에 배달이 왔다.”

“뿌듯하시겠어요. 한 해동안 흘린 땀의 결실이잖아요.”

“그렇제.”     


“내가 꽃을 좋아한다. 집에서도 화분에 꽃을 쓰다듬고 지점토로 꽃도 만들었다.”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꽃이 꼭 어릴 적 아이 얼굴 같기도 했고 나 젊을 때 얼굴 같기도 했어.” 

정성껏 그림에 색칠하는 모습

   

나는 올해 한 경로당 어른들과 ‘청춘 기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듣고 그림도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어른들을 몰랐다는 걸 알았다. 막연히 ‘청춘’이라는 이름을 정해놓고 어른들이 과거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내 멋대로 짐작했다. 어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현재를 즐기고 싶어 하고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기보다 현재로 가지고 와서 음미하기를 바랐다. 빛나고 행복했던 시간을 과거에서만 찾는다면 지금은 무언가 잃어버린 시간이 되고 마니까.

   

20대 젊은이들이 중년인 나의 삶을 더 이상 기대와 즐거움이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어릴 때 본 엄마, 아빠는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즐거운 일을 찾아 하셨을 거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하루 한 번 산책에서 그 계절의 색깔과 냄새를 느끼고, 오늘에서야 알게 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기록하고 싶고 신선한 제철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 그건 내가 70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는 비싸지 않은 옷을 두 벌 샀다. 집에서 입는 실내복으로, 한 벌은 동생 주고, 한 벌은 내 것, 맨날 오래된 옷을 입다가 새 옷을 입으니 아이들 마냥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옷도 가끔 새로운 걸 입어야 새 기운이 충전된다. 나이 들었다고 새 옷을 사지 않으니 의기소침하고 사는 재미가 없었다.     

이숙자 작가의 <칠십 대 후반 노인정 대신 나는 서점에 갑니다>에 나오는 글이다. 새 옷을 입고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이 글이 새삼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노년을 그만큼 피상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나이가 엇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면 조금만 나이가 차이가 나도 나와는 다른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부모가 아닌 그 나이대의 어른과 교류한 경험이 없다 보니 너무 깍뜻하게 존대를 하거나 “나이에 비해 정정하세요”같은 나이와 연관된 이야기만 하게 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나라면 칭찬으로 하는 그 말이 반갑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과 재미있게 놀아본 경험은 서로에게 나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한다. 나이 어린 사람은 20년 후에도 계속 재미있게 살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기고, 나이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서 자신감이 생긴다.   

   

<사서 고생> 멤버인 희남이 삼촌과 지리산 아빠는 노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나는 애들한테 손 안 벌릴 거야. 무조건 요양병원에 들어가려고 보험이랑 다 준비해놨어.”

지리산 아빠의 말에 희남이 삼촌이 대꾸했다.

“나는 요양병원은 싫어. 그냥 최대한 내 힘으로 살다가 갈 거야.”

“그게 마음대로 되간디?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지.”     

이런 대화 속에서 나는 막연하지만 연령대가 다르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마당을 함께 쓰는 공동주택을 그려보기도 한다. 


김초희 감독은 <1인 가구 영상 토크쇼>에서 노후는 돈이 아니라 젊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해요. 지금 제70대 친구가 그런 것처럼요.”          


노년이 되면 또래 친구들은 거동이 불편해서 자주 만나지 못해 고립될 수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자주 와서 어울리면 삶이 윤택해진다고 했다. 김초희 감독은 나이 들어도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면 경제력보다 체력과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김초희 감독은 배우 윤여정과 절친이다. 그녀가 연출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두 1인 가구인 이유는 그녀 지인들이 모두 1인 가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의 준비한 걸 삼분의 일도 말하지 못한 채 끝나서 허탈했지만, 어른들은 강의에서는 청중과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내게 알려주었다.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시는 어른에게 배우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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