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함께 일어나고 잘 때도 리모컨을 놓지 않는 아빠가 나한테 전화를 할 때는 뭔가 알려줄 게 있을 때다.
“니가 텔레비전을 안보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모르잖아.”
아빠는 새싹보리가 몸에 좋단다 사 먹어라, 치약에 oo 성분이 없는 걸 사라, 라며 지식 전달자 역할을 자처했다.
“코로나 백신 예약했어?"
초밥이한테 온 카톡.
“엄마가 백신 예약하는 것도 모를까 봐?”
“텔레비전에 40대 백신 접종 시작한다고 나오는데 엄마는 텔레비전 안 보니까 모르잖아.”
아빠를 만나러 간 초밥이가 뉴스를 보고 톡을 한 거였다. 어쩌다 내가 이런 캐릭터가 됐을꼬.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영화, 연예인은 브런치 글을 통해서 알게 되는 형편이다. 그날도 <오징어 게임>에 관한 글을 읽고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밤 10시부터 새벽 3시 30분까지 시청했다.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줄다리기를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구령에 맞춰서 줄을 당겼고 다리에 얼마나 힘을 줬나 쥐가 날 지경이었다.
현실에 대입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참가자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우승자가 받는 상금에 일억 씩 적립이 되는 건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득이 되는 구조, 참가자들끼리 살인을 해도 게임 주최자들이 모른 척하자 더 큰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상황이 그랬다.
이정재를 보면서 배우들은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대리 경험을 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니 말이다. 그동안 이정재 배우는 아무리 지질한 캐릭터를 연기를 해도 (외모는) 동화되지 않는 멋짐이 있었는데 <오징어 게임>에서는 성공했다! 이정재도 세월은 비켜갈 수 없구나, 하다가 구질한 게 또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배우란 배역과 일치될수록 멋있는 거야, 싶었다. 이정재는 이제 믿고 보는 배우. 이런 배우 때문에 정주행 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할 때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연출했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범죄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는 정서가 다치는 기분이고 자극적인 즐거움은 더 강한 자극을 부르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이 승자독식 현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의 실패를 바라는 마음을 적나라게 보여줘서 잘 만든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필요 이상의 잔혹한 장면은 이 드라마조차 자본의 힘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건 자극적인 이미지에 익숙해졌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까.
고미숙 평론가는 돈이 많다는 건 감각적 쾌락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다 보면 무료해져서 결국 변태가 되고 만다는 걸 <오징어 게임>의 VIP들이 보여준다고 했다. 사람은 생리, 심리, 윤리 세 가지가 충족이 되어야 행복한데 화폐 한 가지만 좇는 삶은 생리, 심리, 윤리가 파탄된다고 설명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승리해서 상금을 탄 주인공이 돈을 쓰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서 고미숙 평론가는 주인공 이정재가 게임을 할 때의 그런 집중력과 정성으로 일상을 살아냈다면 어땠을까를 질문했다.
나는 강의할 때 어떻게 하면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편안하게 들리게 할까, 훈련 방법을 찾다가 책을 낭독하고 녹음해 보기로 했다. 책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분명히 읽고 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없는 신기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걷거나 소리 내서 읽고는 하는데, 낭독하고 녹음한 걸 들으면 두 번 읽는 게 되니 안성맞춤이었다.
책 낭독하면서 조용히 행복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이렇게 만족감을 준다. 시간을 스스로 운용하고 순간 떠오르는 신선한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도 그렇다.
성장하는 즐거움에 맛을 들이면 말초적인 자극을 찾지 않게 된다.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술을 마시거나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도 있겠지만 감각적인 쾌락의 등에 올라타서 고삐를 잡을 수 있는 사람도 바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소모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자라게 하는 일은 충만한 기쁨을 안겨준다. 밥을 잘 먹고 난 뒤에 기꺼운 마음으로 일을 하듯 오전에 글을 쓰고 과외수업을 시작하면 이 일 또한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학생들과 나는 수업료를 내고 수업을 듣는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인연으로 생각해야 이 시간조차 내가 주인일 수 있다. 나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길 수 있으려면 마음을 다해야 한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의 이런 마음과 상관없이 학생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부모님이나 친구와 다퉈서 기분이 엉망이거나 각별한 정이 있는 예전 선생님과 나를 비교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때에도 괜찮은 직업인이나 어른으로 학생을 대하고 싶다. 내가 학생에게 가르치는 건 수학만이 아니다. 성실, 책임감, 자제력 같은 것도 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이라면 사라졌다고 여긴 열정이 되살아날 수 있다. 이전에 느꼈던 억울함은 찾아볼 수 없는 순전한 열정. 그런 정열 아래에서 우리의 인생은 꽃을 피우는 게 아닐까.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딸을 키우는데 456억까지 필요한 건 아니다.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먼저 인생을 먼저 살아본 선배로서 돈 말고 중요한 가치가 많다는 걸 알려주는 일이 소중하다. 세상이 겁을 주는 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기보다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말이 아닌 내가 사는 모습으로. 사는 건 녹록지 않겠지만 언젠가 딸이 선택의 순간에서 나를 떠올리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다면 456억 이상의 상금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