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할머니 선물로 시장에서 지갑을 산 적이 있었다. 금색의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동전지갑이었다. 포장지를 뜯고 지갑을 열어본 할머니는 "지갑을 줄 때는 돈을 넣어서 주는 거"라며 버럭 화를 냈다. 할머니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할머니가 던진 지갑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분희 언니가 나섰다.
"애가 생각해서 선물을 주면 고맙다고 하면 되지 왜 그래요?"
그때서야 할머니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겸연쩍은 감정을 터프한 방식으로 표현을 한 건지 지갑을 줄 때는 반드시 돈을 넣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연기를 한 건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연기는 리얼했고 나는 충분히 무안했다.
할머니도 꼼짝 못 하게 하는 언니가 내 눈에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 시절,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과 언니는 달랐다. 사려 깊고 신중한 태도를 언니는 어린 나이에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눈 오는 밤,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읍내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큰아버지를 업고 끌고 끝에는 기다시피 해서 집까지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언니가 아버지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울었던 날이라고 했다. 몇 년 전 내가 언니는 힘들었을 때가 없었냐고 물었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자기의 힘든 처지를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는 언니의 아픈 이야기를 들은 건 그때가 유일했다.
커가면서 순간순간 언니가 생각났고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언니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생겼고 이제는 ‘우리 언니’가 아니었다. 다른 가족이 되어 몸도 마음도 멀리 떠난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강원도로 교사 발령을 받아서 간 언니를 생각하면서 쓴 동시로 상을 받았는데, 아무리 멀리 있어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언니 또래의 학교나 학원 선생님, 간호사를 보면 어김없이 언니가 떠올랐고 그들에게 무작정 호감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처음 학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 언니가 생각났고 이후에도 문득문득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언니가 떠올랐다. 단순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내가 생의 다음 단계로 건너갈 때, 전과 다른 능력이 요구될 때 언니가 생각났다.
결혼하고 만난 큰 시누의 딸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에게 시조카인 그 아이를 나는 과외를 해주겠다고 했다.
“마침 시간이 있으니까 가르쳐줄게요.”
내가 살고 있는 군산에서 큰 시누가 사는 김제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과외를 하러 갔다. 조카는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나한테 왜 그래요?”
조카가 한번 물은 적이 있다. 그 말에 담긴 뜻이 고마움은 아니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는 원망이 섞인 질문.
“숙모한테 사촌언니가 있거든? 12살이 많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편이 돼주던 사람, 지금도 늘 고마운 사람. 그 마음을 언니한테 갚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언니 같은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왜 그때 분희 언니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질문을 조카가 했을 때 그냥 분희 언니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를 조카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책상 위에 조카가 만든 빵이 올려져 있는 건 그 이후부터였다.
조카가 제빵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그거 정말 좋은 직업이다. 나중에 창업도 할 수 있잖아?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일을 변형해나갈 수 있는 일이 좋은 것 같아.”라고 했고, 조카는 나를 만나면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쟈가 말이 없는데 너한테는 말을 잘한다이.”
시어머니가 한 말이었는데 거기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조카는 중학교 3학년까지 용돈이 없었다고 했다. 마트를 운영하던 형님은 아이들이 마트에서 간식을 가져다 먹으니까 따로 용돈이 필요 없다고 했다.
“형님, 애들도 사회생활이 있어서 친구들과 뭘 먹거나 놀러 갈 때 돈이 없으면 혼자 빠지게 되니까 날짜를 정해두고 용돈은 꼭 줘야 해요.”
내가 한 말 덕분에 조카는 그날부터 용돈이 생겼다고 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된, 낯선 여인이 어느 날 나타나더니 조카의 16년 인생에 처음으로 용돈의 역사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나는 시어머니, 형님과 있던 그 자리에서 말하고 난 뒤에 쌩한 분위기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한테는 그렇게나 기록적인 순간이었다니. 나중에 조카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배를 잡고 웃었나 모른다.
조카는 나를 많이 도와줬다. 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초밥이와 놀아줬고 갓난쟁이였던 초밥이를 데리고 장거리 운전이 하는 게 겁이 나서 조카와 함께 대구를 가기도 했다. 조카는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 있는 가족사진에 있는 (쌍꺼풀 수술 전) 내 얼굴을 사진 찍어서 두고두고 놀려 먹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조카는 무슨 불리할 때만 선생님이냐며 거부했다.
대학에서 제과제빵학과를 전공한 조카는 서울에 있는 유명 베이커리에 취직했고 내 생일이면 즉석 미역국을 끓여서 사진을 보내왔다. 과묵하고 스타일이 남자 같아서 내가 “군대 언제 가냐?”하고 놀렸는데(조카는 여자다) 남편과 별거를 하고 있을 때 조카가 보낸 미역국 사진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속이 깊었다.
초밥이한테 조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마음 같아서 한복 입고 결혼식장에 등장하고 싶지만(조카는 나답다고 할 테지만) 다음에 만나게 되는 날이 있겠지, 그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2월에는 분희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