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치 갖고 갈래?

여자라서 좋아 01

by 김준정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남편이 중재 역할을 한다는 건 가능한 일인가. 지혜롭게 혹은 교묘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해도 감정까지 괜찮을까. <5년 만에 신혼여행>에서 장강명 작가는 가치관, 생활 방식이 틀린 사람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겨우 얼굴 보고 밥 먹는 관계로 만드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시간에 장편소설 몇 편을 쓰겠다고 했는데, 나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원하지 않지만 비난이 두려워 다수가 동의하는 편을 택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선택에는 부정적인 반응과 이유를 설명하는 수고로움이 따르기 때문에 편한 선택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속 터질 만큼 느리게 변한다.


사람들이 칭찬해마지 않는 중간 역할을 잘하는 남편일지라도 진심으로 아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엄마는 안 그랬는데’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결혼 초는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여자 친구가 아닌 ‘가족’이 되는 순간 진심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성, 합리성, 배려심 같은 선량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헤치고 한국사람이 김치를 찾듯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사회과 가정에서 답습해온 것들 앞에서 이성의 힘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정작 이상한 건 이 모든 불평등을 만든 사람은 남성인데 여성들끼리의 싸움이 된다는 점이다. 시어머니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며느리의 이야기의 글을 읽으면 나는 시어머니가 안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보다 더한 불평등을 감내하며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칫 며느리의 타당한 주장이 시어머니에게는 왜 당하고만 있었냐는 비난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합리한 상황을 먼저 겪은 선임자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은 이제 막 가족에 편입된 며느리에게 무리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반찬도 꺼내 먹지 않는 딸’에서 '가족들 수저를 챙기는 살뜰한 며늘아기'로 변신하느라 고군분투 중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드라마에 완고한 시아버지를 애교로 살살 녹이고 시어머니의 울화까지 보듬어 안아 동맹관계를 맺는 며느리가 등장했다. 시어머니가 딸과 며느리의 싸움에서 전적으로 며느리의 편을 드는 장면을 연출해 며느리의 승리를 보여줬고, 며느리의 조조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묘책으로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이야기였다. (검색해보니 이승연과 윤다훈 배우가 출연한 <내사랑 누굴까>였다. 김수현 작가, 2002년작)


이 정도면 며느리계의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수준의 슈퍼히어로급 캐릭터지만, 부모에게 그런 며느리를 기대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정작 문제는 여자 스스로 결혼해서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어 한다는데 있다.


여기에 방점은 ‘수동태’에 찍어야 한다. 사랑받아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건 행위의 주체가 상대에게 있어서 소기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가족들 눈치를 봐야 하고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신경을 곤두세워 처신해야 한다.



“김치 갖고 갈래?”


어머님 물음에 나는 어떻게 말해야 기분 안 나쁠까 (대화를 듣고 있는 다른 식구까지 신경 쓰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조금만 주세요. 지난번 것 아직 남아있거든요.”


김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사실 몰랐다. 애 키우고 일하느라 집에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사는 내가 김치통을 열어볼 시간이 있을 리 없다. 김치는 왜 나한테만 물어볼까. 아들한테 물어보면 안 되나. 우리 엄마는 남편한테 김치 가져갈 거냐고 물어보지 않는데.


며느리가 되고 겪는 이런 식의 일들은 김치에 들어간 고춧가루만큼 많고, 아무것도 바꿀 수도 없으며, 하나하나 억울해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족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결국 나만 성격 이상한 사람 된다)


나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다. 뭔지는 모르는데 굉장히 억울하고 나로서는 바꿀 수 없는 무력하고 억압적인 상황에 놓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제일 화나는 건 ‘그래도 우리 집은 낫다’는 논리로 친구, 친정식구들에게 말했던 일이다. 영화라면 통째로 들어내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 집은 제사 안 지내잖아. 당신한테 엄마가 일 안 시키잖아”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 엄마는 당신한테 뭘 시키는지 묻고 싶었다. 서로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남편의 기준은 엄마. ‘우리 엄마에 비하면 너는 편하게 산다’는 말은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서 차마 할 수없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시어머니 생일과 우리 엄마 생일을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내 마음 같은 건 남편이 다시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번처럼 글이 술술 나오기는 처음이다. 손가락 병정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나를 대변하는 기분이다. 아, 소중한 경험이여. 삶이 글이 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딸과 이인가족으로 사는 나는 모든 결정을 내가 할 때 쾌감을 느낀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이제야 능동태로 사는 기분이다. 오랫동안 입고 있던 옷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하다. 식사 메뉴 결정권이 결혼 전에는 아빠, 이후에는 남편이었던 것 같다. 100퍼센트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반반은 아니었다. 먹는 거 가지고 식구끼리 양보 좀 하면 어때, 하겠지만 위계에 의한 결정과 배려는 분명 다르다.


아차, 생각해보니 우리의 메뉴 결정권은 전적으로 딸에게 있다.

“내일 아침 뭘로 할래? 보기 5개 중에 골라. 1번 스파게티.”

초밥이의 빛보다 빠른 대답.

“1번”

어차피 2, 3, 4, 5번도 스파게티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KakaoTalk_20220626_101754578.jpg 사진 찍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초밥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게 나의 첫 연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