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 아침, 나는 귀찮으면 안 먹어도 돼, 강요는 아니고 혹시 밥 생각이 있으면 나오라고, 청유형의 말을 하고, “고만 일나 가 밥 무라”라고 한 나의 어머니를 잠시 부러워했다.
된장찌개를 들고 돌아서는데 초밥이가 장승처럼 서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불러놓고 왜 놀라는 건지. 마주 보고 밥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훈훈한 분위기가 될 뻔했다.
“밥 먹고 정리 좀 하자.”
“정리할 게 뭐 있다고.”
참 이상하다. 밥 먹이고 싶어서 불렀고, 반가웠으면서 의자에 초밥이가 어제 입은 티셔츠를 걸쳐놓은 걸 보고 불쑥 화가 나는 건 왜일까. 다 먹고 얘기할 걸 하는 후회는 초밥이의 저항 어린 말 덕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침묵이 흐르는 익숙한 분위기, 같은 무대에 배역만 바꿔서 등장한 기분이었다. 말을 꺼내려다 삼키기를 여러 번, 부모님도 그러셨겠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정적을 깨 본다.
“이거 뭐게?”
“몰라.”
“마늘종.”
대화 끝. 마침 쫑으로 끝났다.
네가 마늘종을 알았으면 좋겠어
청소를 지시할 권력이 없는 나는 조용히 식탁을 치우고 평화를 선택한다. 엄마도 감정이란 게 있어서 참고 있다는 걸 공기에 실어 보내기 위해 초밥이를 부르지 말아야 하지만 나한테는 일말의 자존심조차 없었다.
“요거트 먹을래?”
“안 먹어”
또 지고 말았다.
다음날.
“학교 일찍 가야 하는데 데려다줄 수 있어?”
택시 타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밥이가 원하는 게 있을 때 들어주는 게 닫힌 방문 앞에서 뭐 먹을 거냐고 묻는 것보다 나으니까. 구차하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초밥이는 자투리 시간도 알뜰하게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 새 립스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거 뭐야?”
“나 인생 립스틱 찾았잖아.”
“한번 줘봐.”
“왜 그렇게 발라?”
초밥이는 내가 바르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빈틈없이 발랐어. 우리 시대는 정직했다고.”
화장품 파우치를 놓고 갔다며 스쿨버스를 보내고 집에 뛰어들어오는 딸을 볼 때 바통 터치하는 기분이다. 나는 장바구니를 가지러 다시 들어오는 일은 있어도 화장품 파우치는 애초에 들고나가지를 않는다. 어떻게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는 초밥이와 몸매를 감추는 옷을 입는 나는 서로 다른 노선에 있었다. 초밥이 얼굴에 흐르는 저 광채는 과거 나의 것이기도 했지만 물이 흐르듯 내게서 떠난 지 오래.
성평등 인식 개선을 위한 예술제를 개복동 성매매 화재 참사 현장에서 했는데 나는 글작가로 참여했다. 미술, 연극 분야 여성 예술가들과 성매매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해와 연대로 풀어가는 가슴 뭉클한 시간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헛헛한 기분에 초밥이한테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마침 금요일인 데다 주짓수를 마치고 배가 고팠던 초밥이에게도 반가운 제안이었다.
“오늘 잘했어?”
내가 글 낭독을 한다고 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최재희 무용가가 몸으로 절망, 고립을 말할 때 받은 감동을 설명했지만 초밥이는 휴대폰과 치킨 사이를 넘나 드느라 바빴다.
“어디야? 맥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그때 보연 언니한테 톡이 왔다. 보연 언니도 몇 달 전부터 행사를 기획, 진행하느라 후련하면서도 허탈했는지 강나루 배우와 같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강나루 배우는 성매매 피해자가 쓴 일기를 낭독했는데, 목소리에 간절함이 전해져 나는 뜨거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강배우는 초밥이와 함께 독립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이가령 감독의 영화 제목은 <리멤버>, 초밥이가 어린 하영, 강나루 배우가 성인 하영 역을 맡았다. (유튜브에 ‘리멤버 이가령’을 치면 초등학교 3학년의 천진한 초밥이를 만날 수 있어요)
“이게 누구야? 이렇게 컸단 말이야? 너무 예쁘게 컸다.”
강배우에게는 5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보는 초밥이가 놀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이 아이 아니 이 분을 바꿔놓은 걸까.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엄마는 누구를 택할 거야?”
“예전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랬더니 정작 내가 좋아한 사람과는 시작도 못해봤더라고.”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초밥이가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학교와 주짓수에서 친구로 지내오다 한 달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남자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초밥이가 거실로 나왔다.
“걔가 막 우는 거 있지.”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심정 나도 잘 알지. 눈치를 보니 초밥이도 운 것 같았다.
“나는 차는 사람도 이렇게 슬플지 몰랐어. 아, 이게 나의 첫 연애야.”
이전에 한 세 번의 연애를 두고 하는 말.
초밥이가 느끼는 감정은 상대에 대한 미안함뿐 아니라 생명이 다한 관계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파도에 쓸려가는 모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기분이랄까. 처음 맞닥뜨린 복잡한 감정에 어쩔 줄 모르는 초밥이를 보고 우리도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