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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20. 2022

창희야,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 09

키 크고 마른 허당기 있는 남자를 좋아했다. 배우 최민용이 이상형이었던 때가 있었고, 최근에는 주지훈도 괜찮긴 한데 내가 차 문을 열어드려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고, 사실 하정우 외모는 내 스타일은 아닌데 뛰어난 유머감각 때문이고, 아, 최근에 이병헌 감독을 (나만) 알게 되었는데, 괜찮...그만하자.    

 

이민기 배우는 기본 조건(키 크고 마른) 외에도 ‘누난 내 여자니까’ 할 것 같은 박력이 있어서 전부터 점찍어 두었는데 <나의 해방 일지>에 출연해 반가웠다. 창희가 폐기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걸 봤을 때, 나에게 남은 유일한 경쟁력, 밥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창희야,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염창희는 20대 나와 비슷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끌어야 하는 유모차 있고 보내야 되는 유치원 있는 그런 여자라는 건데, 뭐 적어도 내가 괜찮다 생각하는 여자는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되는 여자인 건데 난 그걸 해줄 수 없는 남자라는 거, 그게 나의 딜레마야.” 

    

민규(양준명 분)에게 창희(이민기 분)가 말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에 격한 공감을 했던 내가 떠올랐다. 이해는 되는데 살아보니까 그게 다가 아니라며 창희에게 밥 먹이면서 조근조근 말해주고 싶었다.      


창희가 군고구마 기계로 경기도에서 해방해도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자기 과시하는 정선배처럼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 아무리 자랑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줄도 모르는 사람.      


창희가 아버지에게 권했던 3억 권리금에 월 천만 원 순수익을 올린다는 편의점은 계약만 한다고 저절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주인이 아르바이트 모집, 매장 관리, 물건 진열을 휴일, 퇴근 없이 24시간 신경 써야 한다. 예전 학원 일층이 편의점이었고 사장이 학부모였는데, 아르바이트생들이 펑크를 내서 주인이 자다가 가게에 나와 있는 모습을 자주 봤다.      


삶은 월 천만 원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날 아침에 뭘 먹고, 출근길에 무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점심은 누구와 어디서 먹고 저녁은 어떻게 보냈는지, 이 모든 내용이 월 천만 원에 들어갈 수 없다. 돈 이상의 비전 없이 월 천만 원만 생각하고 편의점을 시작하면 후회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해방은 감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처음 운전할 때 차선을 맞추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중앙선이 없는 좁은 길에 맞은편에서 벤츠가 와도 잘도 피해서 갈 수 있는 건 몸으로 익힌 감각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거나 화목한 것 같지 않았지만, 매일 새로운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감이 내게 있었다. 운동회 반대표 계주에 나가고 사생대회에 나가서 수상하지 못하면 실망했지만, 이제 도전 같은 건 않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다. 오뚝이 같던 아이는 언제부터 가능성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 갇히기 시작했을까.     


최근에 시험 보강 수업이 늘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 습관이 돌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거나 먹고 술 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시험이라는 건 이제껏 쌓아온 것을 증명하는 기회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 학교 시험은 그렇다. 덩달아 과외선생님인 나도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온 둑을 허물고 깃발 하나를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도 멈출 수 없고, 낙오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이 유일한 동력이다.   

  

난이도가 높은 시험을 출제하는 이유는 1등급이 동점자 없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다. 1등이 70점인 시험이라면 5등급 이하는 제대로 평가될 리 없다. 하위등급은 동점자가 속출해서 등급을 나누는 게 무의미하지만 진학률이 중요한 학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수포자인 학생이 공식을 외우고 공부를 해도 단 한 문제도 맞힐 수 없다.     


똑같은 시험지를 놓고 1, 2점에 울고 웃는 아이들을 만드는 게 교육일까. 경쟁에서 이겨서 인정받으면 그 길 끝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중시되면 나의 노력, 일상이 하찮게 되지 않을까.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도 예쁘다


일요일 수업을 마치고, 감자볶음을 만들고 오이를 무쳐 한 끼 밥을 지어먹고서야 헛헛했던 속이 편안해졌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만족스러운 집밥처럼, 원할 때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소박한 재료로 만든 반찬이 좋다. 올해 핀 꽃은 내년에 다시 피고, 밤에서 새벽, 새벽에서 아침이 되는 시간이 좋다. 무엇보다 이런 기쁨은 내일도 있기에 아쉬움보다 기대감이 쌓인다.      

소박한 재료로 만든 반찬

글 쓰느라 몇 시간을 노트북에 매달려 있어도 억울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억울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일, 보상이 필요 없는 일이 나를 해방시킨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공감력과 다양한 감정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작은 일에 감동받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처럼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작게나마 남아있는 감수성을 키우면 해방감각도 키울 수 있다.


매일 운전하듯 일출, 일몰, 햇볕, 바람, 집밥이 있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해방은 가능할지도. 한 가지 더, 주변에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두는 것도 필수다. 예를 들면 장애인 봉사 수업을 함께 하는 채움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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