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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디든 가겠구나

by 김준정

양쪽 옆구리가 바지 벨트에 쓸려 찰과상이 생기고, 옷은 물론 배낭까지 땀에 푹 절어 몸에서 마구간 냄새가 나면 이상하게 모든 걸 내려놓게 된다. 어디 갖다 버려도 아무도 주워갈 것 같지 않는 몸에서는 어이없게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거리 25킬로미터, 산행시간 10시간 백두대간을 한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40년 가까이 등산을 해온 선배님이 “이제 어디든 가겠구나”라는 댓글을 달았다. 이전에 내가 12킬로미터 , 5~6시간 산행을 했기 때문에 한 말일 거다. ‘어디든 갈 수 있다’ 생각할수록 근사한 말이었다.


KakaoTalk_20220726_190857343.jpg 비는 오고 밥은 먹어야겠고

희남이 삼촌이 산악 마라토너들이 모인 산악회라고 잔뜩 겁을 주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약삭빠르지 않은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딱 그런 분들이었다. 장거리 코스만 해서 신입회원이 드물어서인지 몰라도 유난히 나한테 관심이 많아서 나는 전학생이 드문 산골학교에 전학 온 기분이었다.


“전부 나한테 전화 와서 말이여. 준정이 이번 주 오냐고 물어보고 난리여.”

희남이 삼촌이 말했다.


삼촌이 내가 글 쓴다고 했는지 석산고님이 나한테 어떤 글을 쓰냐고 물었다.

“제가 추구하는 건 유머예요.”

“유머?”

“네, 웃긴 글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같은 글을 쓰는 게 목표예요. 미국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이야기인데요, 야영 중에 곰을 만난 줄 알고 작가가 친구와 나눈 대화는 압권이에요.”

“뭐 하는 거야, 브라이슨? 그냥 놔둬. 곧 사라질 거야.”

“어떻게 넌, 그토록 차분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해.”

“내가 생각하기에 난, 조금쯤 놀랄 권리가 있어. 용서해줘. 나는 숲에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있고, 어둠 속에서 곰을 바라보고 있어. 손톱깎이 외에는 자신을 방어할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친구와 함께 말이야. 하나 물어보자. 저게 곰이고 너를 향해 달려오면 너는 어떻게 할래. 발톱이라도 깎아줄 거야?”


내친김에 이 부분을 요약해주자, 석산고님과 알도령님이 책 제목을 재차 물어보며 읽어봐야겠다고 했다.


젊을 때 체력은 그냥 주어졌다면 중년 체력은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적당한 운동은 활력은 줄 수 있지만 체력은 주지 않는다. 생각보다 강도가 센 운동을 해야 하지만, 우리 몸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걸 보면 내 몸의 가능성을 믿게 된다. 아직 기능이 다하지 않았어. 쓸만해하는.


자발적인 고통은 외외의 소득을 준다. 내장에 있는 수분까지 빠져나가 변비까지 생길 지경이 되면 입으로 들어가는 건 뭐든 맛있고 감사하다. 이번에도 앞서 가던 회원이 마지막 1킬로미터 남긴 지점에 파프리카를 놓고 갔는데 세상에 나는 파프리카가 그렇게 단지 처음 알았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 흔히 하는 말인데, 나는 왜 올라가는지 질문하기 위해서 가는 것 같다. 힘든데 왜 하냐를 10시간 내내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일은 왜 하는지, 글은 왜 쓰고 왜 사는지로 이어진다. 이왕 태어난 거 주저하고 망설이는데 시간 허비하지 말고 살아보자, 하는 대책 없는 결론에 이르는데 이때 몸에서 나는 마구간 냄새가 큰 역할을 해준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뭔가.


휴가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지리산 종주다.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지리산에서 밤과 새벽을 맞이하는 일은 5년 동안 바뀌지 않고,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순간이다.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감사하다. 딱 한 가지 욕심을 더 내자면 딸과 지리산을 걷고 싶은데 올해도 실패다. 말 꺼내자마자 거절당했다.

“언제쯤 엄마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걸.”

KakaoTalk_20220726_190922648.jpg 다 내려놓고 얼굴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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