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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 수퍼'와 편의점

by 김준정

전남 곡성 천덕산 산행을 마치고 맥주를 사려는데 슈퍼가 보이지 않았다. 한산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편의점이 나타났고 그 옆에 ‘삼거리 수퍼’라는 자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삼거리 슈퍼에 가서 한 종류밖에 없는 맥주를 사고 꼿꼿한 주인 할머니에게 만원을 건넸다. 맥주 2개, 콜라 1개, 과자 두 봉지 8,450원을 할머니는 계산기 없이 눈으로 계산한 뒤 정확히 1,550원을 거슬러 주었다.


삼거리 슈퍼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려는 대기업의 상술이 내 눈에는 이웃이기도 한 이들을 갈라놓고 할머니가 벽장 안에 감춰둔 동전까지 털어가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편의점 사장이 삼거리 슈퍼 할머니 아들이라던가 편의점과 슈퍼 모두 할머니 소유라던가 하는 내막이 있는지 뜨내기손님인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산을 다니면서 시골 구석구석까지 들어선 편의점을 보면 나는 뭔가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KakaoTalk_20220209_083738473.jpg '삼거리 슈퍼'와 편의점

한 자리에 오래 머문 소박한 가게를 이용하고 싶다. 낯설지만 내 기억 어딘가 닿아있는 그곳이 정겹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날을 잡아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온 주민들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 장을 보고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군내버스를 타기라도 하면 흔들흔들 차창밖을 바라보면 마냥 평화로운 기분에 젖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버스 안에서 주민들의 두둑한 장바구니를 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자가용에 가득 실은 쇼핑백보다 장바구니에 든 물건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는 건 왜일까. 장바구니에는 평소 먹지 못했던 별식이나 생활에 요긴하게 쓸 물건이 들어있을 것만 같다.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운 좋게 5일장을 만나는 날이면 나는 둥굴레차 같은 것을 사면서 부자가 된 기분을 만끽한다.


오늘 천덕산을 간 이유는 인간극장에 나온 <현옥이네>때문이었다. 현옥이네는 천덕산 인근에 있는 와룡마을 제일 끄트머리 외딴집에 살고 있는데 현옥이 엄마가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현옥이가 아이스크림 대신 고드름을 먹는 모습이 나에게는 생생한 삶으로 보였다. 등산을 마치고 현옥이가 뛰어다녔던 동네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오곡종합건강센터-오봉대 팔각정-깃대봉-천덕산-헬기장-큰 봉-곤방산-심청마을 코스를 걷고 차로 현옥이네를 찾아가 보니 새로 지은 집에 마당에는 1톤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나만 현옥이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7년 전 방송에서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한편 내가 뭐라고 ‘생생한’ 무엇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KakaoTalk_20220209_084325568.jpg 곡성에 '심청 마을'이 있어요

날머리 '심청 한옥마을'을 걸으면서 나, 지리산 아빠, 유선수는 왜, 여기, 이곳 곡성에 심청인가에 대해서 한판 토론을 펼쳤다. 막연히 바닷가일 거라고 생각한 우리들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기하기 위해 택시를 탔고 기사님이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옛날에는 섬진강에 물이 많아서 중국 상선도 왔다 갔다 했데요. 이 마을(송정 마을)에 심가가 많이 살기도 했고요. 그런데 곡성군이 옹진군과 재판을 해서 져부러서 다섯 번인가 했던 심청 축제도 못하게 돼버렸다니까요.”


아, 중국 상선, 심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에게 기사님은 곡성군이 옹진군에게 심청이를 뺏기고 심청 축제를 효축제로 이름을 바꾼 뒤 관광객이 줄었다는, 심청전만큼이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곡성에 그런 곡절이 있었다니. 그래서 심청 한옥마을에 관광객이 없고 관리가 안되어있었구나. 검색을 해보니 백령도에 ‘심청각’이 있었고, 심청이가 빠진 인당수가 백령도 두문진 앞바다라는 설립 배경 설명이 있었다. 백령도의 심청각을 가보지 않은 나는 어쩐지 곡성의 심청마을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KakaoTalk_20220209_083434667.jpg 이런 사진을 찍고 나서 인지도 모르겠어요


군산에 와서 뒤풀이로 수제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미애네 집’은 탕 전문 식당인데 미애네 집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고 이웃사촌이기도 한 분(삼촌) 때문에 너무 자주 가다 보니 일요일 6시에 오는 손님들과 계모임을 하는 것 같아서 오늘만큼은 가지 말자는데 지리산 아빠와 나는 합의했다.


삼촌은 이번 주에 산악 마라토너들로 조직된 산악회로 백두대간을 갔는데 내가 따라간다고 할까 봐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면 폭탄이 될까 봐 그런 모양이지만 삼촌을 뺀 지리산 아빠, 나, 유선수는 우리대로 오랜만에 여유로운 산행에다 곡성 심청이, 현옥이네를 두루 만나서 만족스러웠다.


‘군산 비어 포트’는 네 개의 수제 맥주 가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어서 넓은 공간에 테이블 사이 간격도 컸다. 미애네 집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그곳에서 우리는 백화점에 구경간 아이들처럼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맥주가 긴장을 저 멀리 날려주었다. 게다가 위치가 군산의 오래된 포구인 째보선창이어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페일 에일을 꿀떡꿀떡 마시다 보니 기분이 한정 없이 좋아졌다. 단 하나 단점은 안주가 부실하다는 점이었는데 간장 치킨은 짰고 감자튀김은 감자튀김 맛이었다. 맥주를 숙성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은 탓인지 모른다는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지다가도 우리는 음식 솜씨가 좋은 엄마를 둔 아이처럼 미애네 집의 기본 반찬이 여기 주메뉴보다 낫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한편 삼촌도 살벌한 산악회에서 외로웠는지 수제 맥주를 마시러 간다고 했을 때는 오지 않겠다고 하더니 뒤늦게 마음을 바꿔 합류했다. 내가 바이젠 500cc을 주며 가격이 7,000원이라고 알려주자 삼촌은 기겁을 하더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고만 했다.

KakaoTalk_20220209_090226815.jpg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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