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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산에 가면 일어나는 일

by 김준정

“안녕하세요. 고객님 ㅇㅇ정수기 코디예요. 이번 달로 5년 렌털 기간이 만료되어서 안내차 전화드렸어요. 지금 새 제품으로 바꾸면 석 달 렌털료 면제에 이후에는 지금 내고 있는 렌탈료 18,800원을 그대로 내시면 되지만 기존 정수기를 사용하면 15,500원의 관리비용을 내셔야 해요. 이번 기회에 가격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온수 겸용 정수기로 교체해보시면 어때요?”


정수기 회사 직원의 말을 들어보면 새 정수기로 교체하는데 혜택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정수기를 바꾸자고 설치 날짜를 정하고 기다리는 일, 여러 사람의 수고를 끼치는 일, 헌 정수기를 줄 데가 없어 결국 버리게 될 일을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이참에 정수기를 아예 없애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생수를 사다 나르는 일이나(택배로 주문하는 건 기사님한테 못할 짓), 플라스틱 병을 생각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쓰던 정수기를 그대로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이틀 동안 직원에게 4번의 전화, 3통의 문자를 받았다. 담당 직원에게 수당이 돌아가거나 회사로부터의 압력 때문이 아닐까 싶어 권하는 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선택을 강요받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 ‘특가 세일’ ‘마지막 찬스’를 라며 쇼핑을 부추기는 광고가 카톡, SNS, 포털사이트에 쏟아진다. 혹하는 마음이야 없지 않지만 그때마다 광고창을 열어보다가는 하루가 다 가버릴지 모른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 내 삶 전체가 유혹의 바다에 출렁거릴지도.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나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한 공격은 구매를 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광고에 노출되다 보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어느새 필요한 것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나도 한동안 로봇청소기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광고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청소기도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게 어쩌다 필수품이 되었지? 하는 생각을 했다. 건조기, 스타일러, 김치냉장고, 공기청정기 등등도 그렇다.


예전에 학원에서 청소할 때 업소용 청소기가 있었지만 전기 코드를 꽂아서 끌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빗자루를 사용해봤더니 그게 오히려 편해서 지금도 나는 집에서 빗자루를 사용한다. 소비문화가 끌고 가는 대로 가다 보면 로봇청소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역으로 과거를 거슬러 생각해보면 빗자루나 다른 대체 용품을 찾을 수 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테이프 클리너를 생각해내기도 했다.


문제는 로봇청소기가 끝이 아니라는데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또 다른 욕망을 부추겨서 끊임없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만들어낸다. 물자가 풍족한 지금은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고는 기업들이 이익을 낼 수가 없는 이른바 ‘욕망을 욕망하는’ 단계에 와있기 때문이다.


이나가키 에미코는 책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에서 전기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초를 사용하고 냉장소, 세탁기 없이 생활한다. 그녀는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승리감이 든다고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표현) 했다.


빗자루를 사용할 때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말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을 때, 텀블러를 챙겨 오지 않았던 날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참았을 때, 스티로폼과 냉동팩과 함께 배달될 신선식품을 주문하지 않을 때 내게 욕망을 다스리는 힘이 있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든다.




예전에 나는 ‘필요하지 않은 필수품’을 살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어서 집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지 못했다. 그 물건들은 나에게 자유를 줄 것처럼 달콤한 유혹을 했지만 실제로는 더 큰 속박에 갇히게 했다.


걷고 싶거나 요리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주말에만 생기지 않는다. 자유를 제한당하는 보상심리 때문에 광고에 주입된 욕구를 내 것이라 착각하고 조정당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는 그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하고 금세 또 다른 욕구로 옮겨가기를 반복하면서.


어딘가로 출근하는 삶을 떠난 지 2년 6개월이 되었다. 현재는 오후 3시 30분이나 5시에 거실로 출근을 하고 네다섯 시간 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규칙적이고 분주하다.


오전 7시면 밥을 하고 8시부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11시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서 점심을 만들어먹고 오전에 쓴 글을 고친다. 딸의 간식을 준비하고 수업을 시작하면 밤 9시나 10시에 끝나는데 1시간쯤 무가지를 하다가 잠이 드는 하루가 나의 일상이다.


전과 달라진 가장 큰 변화라면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 이유가 내 안의 억울함이 작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매일 내가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먹고 원하는 산책코스를 여유 있게 할 수 있어서 보상해야 할 욕구가 없는 것이다. ‘매일 하기’가 포인트다. 주말까지 기다렸다가 허기를 채우듯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매일 누리는 소소한 일상이 커다란 행복으로 채워지는 걸 경험했다.


나는 지금껏 '매일이 축제'인 삶이 멋진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인생은 정말 피곤할 것이다! 아니, 매일이 축제라면 그건 더 이상 축제가 아니다. 그저 불안정한 일상의 연속일 뿐.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나오는 글인데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는 밥, 국, 채소 절임 같은 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매일 “자전거를 쌩쌩 몰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 마음을 이제는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생활을 유지하는데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지만 가끔은 이런 결정을 한 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학원을 폐업하고 글을 쓰기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동기를 생각하다가 등산으로 이어졌다.


내 생각과 의지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나는 나를 둘러싼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강요된 선택을 해왔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가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노를 젓는 일이 나에게는 등산이다.


44세인 나는 여성으로서 늙어간다는 것에 매일 좌절감을 느낀다. 40대면 한창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머리로는 끄덕거리지만 늘어나는 뱃살과 주름 섞인 피부를 볼 때마다 좋았던 시절은 다 지난 것만 같다.


이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온갖 생물들의 숨이 섞인 바람, 포근하고 따뜻한 햇살을 쪼이다 보면 나는 소중한 존재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고유의 나로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고 노화조차 내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모아진다. 이 생각이 이어지지 못하고 순간순간 상실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따뜻한 경험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내가 가진 걸 알려면 다시 산으로 가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나의 가치를 모른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다 해도 소용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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