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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슬리퍼지

by 김준정

여수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간 곳은 올리브영이었다. 화장품이나 액세서리를 (주로 초밥이가 골라줬지만) 마음에 드는 것 하나씩 사는 일을 여행지에서 하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할 수 있지만 해야 할 일과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는 것, 그게 여행의 이유니까.


초밥이는 시내(종화동)에 더 있고 싶어 했고, 나는 오동도 근처 책방을 가고 싶어서 우리는 쿨하게 찢어지기로 했다.


“같이 가줄까?”

“아니. 엄마 눈치 안 보니까 더 좋은데?”

이심전심. 우리는 행복한 비둘기 가족이다.


<낯가리는 서점>은 오래된 동네의 신문배급소 옆에 있었다. 한 사람이 사랑한 책들로 채운 아담한 공간은 그 사람의 세계였다. 때로는 위로를, 유년의 추억이 있는 책들을 열어볼 때 그 사람의 과거와 내밀한 정서를 염탐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눌 수 있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듯 책장을 넘겼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KakaoTalk_20220827_201629559.jpg <낯가리는 서점>의 책과 자두 에이드

“엄마, 너무 더워. 이순신 장군 앞에서 나 사진 찍어줘.”


헤어진 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그놈의 사진 때문에 나는 서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자기 앞의 생>은 다른 판본이 집에 있지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우리의 이야기는 반짝일 거야>는 사랑스럽고 곱씹어볼 내용이라, <모범생의 생존법>은 옆집에 사는 모범생이 읽는다는 소문을 들어서 구입했다.


근하 작가의 <사랑하는 이모들>은 첫 장부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더니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어린 나이에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을 지켜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따듯했다. 여행에서 이제껏 몰랐던 책과 작가를 알게 되고 반하는 건 근사한 일이다. 근하 작가의 <대구(달구벌 방랑)>, <언니에게>를 희망도서 바로 대출을 신청했다. 재력이 부족해도 마음은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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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이 호출을 받고 시내로 갔는데 불법주차 단속차가 내 뒤를 따라와서 주차할 곳을 찾아 두 바퀴를 돌았다. 그놈의 사진 안 찍으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고 시내 안쪽 빈 상가 앞에 차를 댔다. 이순신 동상을 배경으로 초밥이의 OK 싸인이 떨어질 때까지 찍었다.


다음으로 초밥이가 옷 구경을 하자고 했다.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을 옷을 걱정하는 이 분은 30년 전 나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가장 두툼한 걸 하나 고르더니 내 눈치를 봤다.


“입어봐. 괜찮으면 사.”

“엄마, 왜 그래?”

“내내 조를 거잖아. 어디 피할 데도 없는데 빨리 사버리는 게 낫지.”


내친김에 내 운동복(여름용)과 슬리퍼도 하나씩 샀는데, 슬리퍼는 신의 한 수였다. 당장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어버리고 반바지, 반팔티를 입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둘이 슬리퍼를 끌면서 돌아다니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초밥이가 가자고 한 카페는 시내에서 10킬로미터, 숙소는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카페는 안 가면 안 돼?”

“여수에 언제 올지 모르니까 가고 싶어.”

“왜 너만 하고 싶은 것만 해?”

나는 책방에 더 있고 싶었고 책 보다가 조금 졸고 싶었는데, 네가 불러서 못했는데 너는 사진 찍고, 옷 사고, 사진 찍고, 사진 찍었잖아.

초밥이는 입을 앙다물었고 차 안은 여수 밤바다가 되었다. 컨디션만 좋으면 뭘 하든 상관없는데 피곤하니까 짜증이 났다. 남한테는 작동하는 인내심이 가족에게는 왜 통하지 않는 걸까. 내 몸이 피곤하고 하고 싶은 걸 가족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냉랭한 기운 속에 운전을 하다 슬쩍 봤더니 초밥이는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의자를 뒤로 눕혀줬다.


펜션에 와서도 사진 촬영은 계속되었고 이제 나도 헛된 반항은 하지 않았다. 가족끼리 밤새 나눌 이야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에 맥주 세 캔을 먹고 저녁 8시에 가방을 베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펜션은 복층으로 침대는 이층에 있었는데 자다 일어나 보니 불은 꺼져 있고 나는 1층 바닥에 누워 있었다. 버려진 기분이었다. 어미는 이불도 배게도 없이 자는데 초밥이는 침대에서 공주처럼 자고 있었다.


다음날, 검은 모래 해변에 가서 나는 그늘에 돗자리를 펴서 책을 읽고, 초밥이는 땡볕에서 촬영을 재개했다. 하늘, 구름, 바다, 햇볕, 모래는 초밥이에게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나를 불러서 가봤더니 전화기를 들고 서있으라고 했다. 나를 인간 삼각대 삼아 카메라를 보고 까르르 웃고 윙크를 하는 녀석이 무서웠다.


KakaoTalk_20220827_203109413.jpg 같은 여행, 다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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