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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07. 2022

밥 사듯 선물하고 싶은, 남편이 밥하는 이야기

오늘 소감 02

시험을 앞둔 연휴, 딸이 아팠다. 나는 열 39도, 인후통, 콧물, 기침, 가래, 근육통으로 힘들어하는 딸을 데리고 링거를 맞히기 위해 병원에 갔다.

"모든 증상이 다 있네요? 그런데 코로나는 아니에요. 독감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코로나 검사를 하고 말했다.
 
"어떻게 이게 코로나가 아닐 수 있지?"
"우리는 '인정받지 못하는 코로나'에 걸리는 체질 같아."

얼마 전 나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몸살 비슷한 증상을 겪었지만, 코로나 검사에서는 음성이 나왔다. 수액을 맞으러 가는 딸의 얼굴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딸이 다니는 중학교는 코로나라면 중간고사 대신에 기말고사 성적을 200퍼센트로 처리해주기 때문이었다.
 
딸은 잠들었고, 나는 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픈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아이는 링거를 다 맞고도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고 해서 조금 앉아 있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먹을 수 있겠는 걸 말해 봐."
"김치죽 같은 거 먹을까?"

우리는 죽집에서 낙지 김치죽을 먹고 귤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열 내렸는데 다시 오르면 시험도 못 봐. 공부하지 말고 일찍 자."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잤지만, 시험공부는 전날 하는 걸로 아는 딸이 어떻게 했나 모르겠다.

이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날, 아이는 잔기침은 있지만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나는 사흘간 죽을 먹은 아이에게 누룽지, 갈치구이, 열무물김치, 김치찌개를 차려줬다. 갈치 살을 발라주고 김치찌개 속 김치의 연한 이파리를 찢어줬다.

보통 때 같으면 이제 됐어,라고 할 타이밍이 지났지만 아이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아이가 일어난 자리를 보니 수북이 올려놓았던 갈치 살이 하나도 없는 걸 보고 나는 안심했다.
 

초밥이한테 만들어준 해물죽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한때는 광역시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인구 삼십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약속 장소인 카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보려고 했지만 두 번 거절당하고, 지도 앱을 켰지만, 터미널 내에 카페가 있다는데 자꾸만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결국 카페 찾기를 포기하고 만나기로 한 사람이 나를 찾는 걸로 해결되었다.
 
볼 일을 마치고 밥 먹을 곳을 찾았다. 군산에 가서 먹을까 했지만, 아침부터 빈 속이라 그 상태로 차에 타면 메스꺼울 것 같았다. 터미널 내에는 김밥, 만두, 버거 등 꽤 다양한 메뉴의 가게가 있었고, 그중에 나는 콩나물국밥을 택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이 그렇듯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규격화' 된 맛이었다. 옆 자리 커플은 국밥 한 그릇을 나눠 먹고 있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온 분들이 눈에 띄었다. 뜨거워서 빨리 먹지 못하는 국밥을 먹을 여유가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사는 도시보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고 걸음이 빨라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군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매일 출퇴근으로 쓴다면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자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밥 먹은 지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냉장고에서 돼지고기와 김치를 꺼냈다. 반만 남아 있던 두부와 파를 넣고, 식초와 국간장을 한 숟갈씩 넣었다. 칼칼하고 뜨거운 국물이 속에 들어가자 살 것 같았다. 먼 곳을 갔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
 
나와 가족이 먹기 위해 만든 음식은 식당에서 줄 수 없는 '온기'가 담겨 있다. 내 집의 친숙함을 오성급 호텔이 줄 수 없는 것처럼, 사 먹는 음식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지지고 볶고, 설거짓거리가 한가득 나오는 밥 짓기는 삶과 닮았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반찬은 같으면서도 다른 하루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난한 그 일을 묵묵히 하는 가족이 있다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일도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배지영 작가의 신간 <남편의 레시피>는 남편이 밥 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일방적인 사랑은 없다.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속성을 가지려면 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남과도 관계를 유지하려면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데 가족은 말해 무엇할까.


밥 짓기를 남편이 한다고 해서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정의 온기는 함께 만드는 것이니까. 책을 읽다 보면 요리를 못하는 아내의 번민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강썬아, 너는 왜 달걀프라이를 안 먹는 거야?"
"반찬이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확실한 반찬이야."
"엄마, 나는 아빠 밥 먹고 크는 애야. 달걀프라이는 김치볶음밥 위에 올라가는 데코야."

그리하여 나는 강성옥 씨가 집에 못 들르는 저녁에는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굽고 팬에 남은 기름에 김장 김치를 구워 밥을 차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내가 왜 대견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따뜻한 집밥을 먹은 것처럼 속이 차고, 딸과 나의 온기가 식지 않게 부지런히 장 보고 요리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남편은 밥을 짓고, 아내는 글을 짓는 맛있는 이야기가 있는 책, 지인들에게 밥 사듯이 선물하고 싶다.

"남편의 집밥 26년"에서 '노예 12년'이 생각나는 건 저만 그런 건가요?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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