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할머니가 자꾸 빨리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뭐라고 반응해줘야 해?”
할머니 집에 간 초밥이한테서 온 문자다.
악착같이 살아내왔던 그분의 시간을 생각하니 나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늙는다는 것이 나와 멀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머뭇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이 자식에게 짐이 지우는 것만 같을 때, 앞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 나라면 손녀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을까?
“엄마가 그림책 서너 권 빌려올 테니까 그중 한 권으로 토론하자.”
“시험 한 달 남았어.”
“지금부터 안 하고 시험 끝났다고 한두 주 쉬면 금세 두 달 지나가잖아.”
“...”
“그리고 그 책을 할머니한테 선물하는 거야.”
“오 좋은데?”
“외할머니한테는 전화로 읽어드리면 어때?”
“그래.”
나는 바버러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지만, 그것은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있었다. 약간의 협박과 회유가 필요했고, 자발과 강제 그 어디쯤에서 우리는 타협하고서야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
“손녀가 화자고 고모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화자가 아니라 서술자 아닌가?”
“서술자? 화자라고 하지 않아?”
“아냐,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서술자라고 했어.”
나는 검색을 통해 화자, 서술자는 같은 뜻으로 혼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초밥이의 저항 어린 마음도 느꼈다.
어린 시절 럼피우스는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고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한 가지 일이 남았다고, 그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알려준다. 나이가 들어 바닷가 집에 살던 럼피우스는 자기에게 남은 일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루핀 꽃씨를 온 마을에 뿌렸고 다음 해 마을은 색색의 루핀이 가득 차게 된다.
“너는 커서 뭘 하고 싶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모르겠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남으면 기부도 할 수 있겠지.”
“나한테도 줄 수 있겠네?”
“그렇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쉽지는 않을 거야.”
월, 수, 금요일은 아파트 요가를 가는 날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 땀이 별로 나지 않아 나는 일주일째 같은 옷이다. 계절이 바뀌면 나도 모르게 옷을 검색한다. 작년에는 벗고 다닌 것도 아닌데 입을 게 없다. 아참 나갈 데도 없지, 간신히 집 나간 정신을 붙잡는다. 이만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의 한 문장을 곱씹는 일, 산책하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메모하는 일 같은, 나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다.
백화점에서 사람들의 옷, 신발, 가방을 흘끔거리는 시간을 오래 보내왔다. 그런 시선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건을 고르는 안목에 대한 인정일 수 있지만 얘기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내고 싶은 호감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아닌 것이다.
외모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은근한 분위기다. 청난방에 면바지가 잘 어울리는 군살 없는 몸, 희끗한 머리칼이 깊은 눈매와 어우러지고, 주름은 있지만 나이를 잊게 하는 환한 미소 같은 것.
아무리 가져도 나일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 나에게 스며들어 결국 나의 일부가 되는 일을 하면서 나이 들고 싶다. 십 년 뒤, 삼십 년 후에 오늘과 같은 하루를 보내도 괜찮다면, 다른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좋겠다.
“이 책처럼 할머니에 대해 글을 써보면 어때?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여자 어른들만큼 조개를 캤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딸을 자랑했고 할머니는 어깨가 으쓱했다' 이런 식으로.”
“좋긴 한데 시간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