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월드컵에 대한 조금 특별한 기억이 있다. 2002 월드컵,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거리에 차들이 빠 밤밤 빰빰 경적을 울리며 새벽까지 잠들지 않던 그때, 나는 해고를 당했다. 내 인생의 첫 해고.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곳은 세계 2위 글로벌 모발화장품 기업이었다. 계약직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에 불어온 IMF 한파로 고용시장은 계약직이 판을 치고 있었다.
과수석에 토익 900점이 넘는 동기는 은행에 취직해서 88만 원 월급을 받았다. 동기는 우리 회사 근처에 있는 지점에 일해서 내가 가서 할만하냐고 물었더니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라고 했다. 옆자리 사수는 고졸사원이었는데 동기에게 “대학 나와도 소용없네”라고 했단다. 고졸학력에 대한 박탈감도 있지만, 갑자기 뒤바뀐 현실에 적응 못하는 어리버리한 대졸 신입사원의 억울함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같은 업무를 하는데 월급은 반이상 적고, 계산기 두드리는 손이 보이지 않는 정도로 업무에 능숙한 동갑 사수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대체 4년 동안 뭘 한 건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토익, 학점관리로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고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낸 대가가 겨우 이건가.
물론 언감생심 어따 대고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학교, 다른 삶의 극단에 있던 동기의 이야기. 나는 몰라도 이 친구만큼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세상에 정의가 남아있다면 정규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대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같은 계약직이지만 외국계 기업은 달랐다. 당시 주 6일 근무가 일반적이었는데, 이 회사는 주 5일 근무에다 모든 징검다리 휴일을 과감하게 연휴로 만들어버리는 통 큰 기업이었다. 내가 10개월 만에 해고당하고도 이 회사 마크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끼는 이유다.
나는 7월에 입사했는데, 여름휴가가 자그마치 12일이었다. 출근을 며칠 하지 않고 휴가에다 제대로 된 업무보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 본사에 왔다 갔다 하고, 워크숍을 가다 퇴직했다.
그 기업은 4년 동안 우리나라 마트에 시판사업을 벌였지만 실적 부진으로 철수를 결정해 전 직원이 퇴직을 맞았다. 순차적으로 퇴직 수순을 밟았는데 나 같은 계약직이 일 순위였다. 과장님, 대리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너는 젊으니까 다른데 취직될 거야. 내가 걱정이지, 같은 말을 들었다. 나도 이 분들은 어떡하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침울한 사무실과 달리 세상은 축제 분위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두 미친 것 같았다. 대구 동성로 호프집마다 대형 스크린을 보며 응원할 때 나도 그곳에 있었다. 와, 하며 함성을 지르면 나도 따라 일어섰지만 곧바로 나의 현실이 떠올라 이럴 때가 아니지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고, 벌떼들은 그런 나를 보며 웃겨 죽으려고 했다.
사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게 그때 나의 심정이었다. 직장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끝나버려 잃은 것도 그리워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앞으로 뭘 하며 돈을 벌지하는 막막함은 있었지만 25살, 당장의 생계 걱정은 없을 때였다.
안정환 선수가 8강 이탈리아전에서 연장 후반 골든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탈락시키는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나에게 벌어진 일만큼 엄청나게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히 동화될 수 없었던, 약간의 방관자 입장에서 바라봤던 알쏭달쏭 나의 2002 월드컵.
2022 월드컵, 아, 20년 이라니. 그동안 나는 착실하게 늙어가는 것 말고 무엇을 했나. 치킨가게 매출이 100~200퍼센트 오르고 주문 영수증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줄줄이 이어진 사진과 기사를 보았다. 내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사이 사람들은 치맥과 함께 잔디밭을 선수들과 함께 누볐던 모양이었다. TV도 없고 출근도 하지 않는 나는 이 모든 분위기와 차단된 채, 2002 월드컵을 떠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