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시인의 월든>에서 박혜윤 작가는 특정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가볍게 사는 태도’를 말했다. 집안일과 돈 버는 일 구분 없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하자는 것.
붙박이장에서 가습기를 꺼냈다. 욕조에 넣고 목욕시키듯 샤워기로 물을 뿌려 구성품을 해체하고 세정제를 묻힌 수세미로 꼼꼼하게 닦았다. 샤워기로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헹궈냈다. 간단한 조립을 마치고 코드를 꽂았더니 시원하게 김을 뿜어냈다.
한 중학교에서 강연을 하기로 해서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PPT를 만들면서 학생들이 지루해하면 어쩌나,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아 작업 속도가 더뎠다.
박혜윤 작가가 말한 태도를 적용해 가습기 청소와 강연을 똑같은 무게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쩌다 하는 강의 압박이 크면 앞으로 쏟아질 강연 요청이 반갑지만은 않을 거고, 결과가 좋아도 나는 긴장 속에 살게 될 테니까. 아무렇게 하자. 마음대로 하자.
마음대로 산다는 건 절제를 통해 가능하다. 출근을 하지 않아야 아침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고, 줄어든 수입만큼 소비를 줄여야 했다. 출근을 해야 했을 때는 아침 식사와 씻는 건 일을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돈없이도>에서 내가 발견한 삶의 가능성과 선택지를 말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책을 조금 읽다가 아침밥을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는 한다. 커피를 내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아이디어를 메모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열고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감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예전의 나처럼 학원을 운영하는 지인이 말했다.
“저도 전에는 야행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출근하지 않으니까 일찍 일어나는 거 있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술을 찾는 날이 많았지만 , 이제는 미련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일 하느라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허기가 술을 불렀다는 걸 알았다.
상황이 바뀌자 모른 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습관 때문에 술을 마시고 쇼핑, 외식을 했지만 점차 횟수가 줄었고 폐업한 지 이 년쯤 지나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변화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외식과 쇼핑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글쓰기 같은 생산적인 일이 소비 욕구를 줄여준다는 걸 알았다. 일상에 여유가 생기자 여행에 대한 갈증이 사라진 것도 변화였다.
<숲속의 자본주의자>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이 길고 내밀한 이야기를 결코 들어주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내게 우주였던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자식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사이가 나빠져도 참을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어머니는 나의 아빠와 닮아있었다. 나는 딸을 키우면서 아빠가 떠오를 때가 많고, 아빠가 옳다고 믿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초밥이는 공부 열심히 하나?”
“나름대로 애써요.”
“진작에 학원 보냈어야지. 네가 안 갈키라만 좀 잘하는데 알아보라고 그렇게 말해도 왜 아를 그래 놔두노.”
“놔뒀기 때문에 지금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싸우는 거 아님)
“영수는 기초가 중요한데 중간에 할라카이 안 되는 거 아이가.”
“공부에 적성이 없는 아이를 부모가 공부를 우선순위로 두면 잃는 게 많아요. 축제할 때 춤 안무를 짜는데 얼마나 열성적인지 몰라요.”
“그런 거 잘하면 무슨 과를 가야 되는데?”
“대학 학과는 과거에 만들어진 거라 지금의 직업과 연결시키기 어렵고, 공부하고 싶은 과를 가면 돼요. 원하는 공부가 없으면 안 가도 되고요. 이제 대학이 아니어도 그룹을 만들고,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박혜윤 작가는 자식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네가 어떤 사람이고, 뭘 원하는 사람인지 묻고 아이가 가진 고유함을 발견하는 건 엄마밖에 해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인도에 살지 않는 이상 아이도 세상에서 좋다는 직업, 공부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안다. 나에게 관심 없는 세상에서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유해진 배우가 유퀴즈에 출연해서 배우 일을 반대해온 아버지가 어느 날 “그럼 한번 해봐”라고 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데 내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고, 마흔이 넘어서도 아빠의 인정에 목마른 나의 마음을 발견했다. 부모의 말 한마디는 그렇게 힘이 세다.
책은 재미있는데 유머 때문에 웃는 게 아닌 궁금함과 기대로 내 안에 파고들 때와 같은 재미였다. 읽은 후에 자책과 조바심보다 느긋하지만 진지하게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직장을 다니지 않은 저자에게 배운 것이 아깝지 않냐고,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나는 직업을 통한 기여도 있지만, 자기만의 오두막에서 발견한 삶의 한 조각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이 인정받았다면 빠른 속도로 변하는 미래는 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에 대범한 사람이 살기 수월하지 않을까. 어쩌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사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그건 모든 순간 집중하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