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Nov 01. 2022

그리움의 맛, 무나물

'돈없이도' 식탁이 풍성해지는 레시피

“돈없이도 식탁이 풍성해지는 레시피 없어?”     


지난번 ‘호박 주까?’는 이런 동동맘의 요청에 의해 썼던 글이라면, 이번에는 무다.     


아침밥을 하기 싫은 날이었다. 나라고 요리가 항상 즐거운 건 아니다. 가스레인지를 켜고 싶지 않은 날이 있는 것이다. 일어나 거실 의자에 몸을 부려놓고 있다가 7시가 되자 마지못해 부엌으로 향했다. 

     

<남편의 레시피>를 읽고 무나물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유튜브를 봐 두었다. 

“이건뭐 요리랄 게 없어요. 그냥 저어주는 거지, 조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영상 속 요리사의 말처럼 조리법은 간단했다.     


완성된 무나물을 한 입 먹는데 내가 아는 맛이 아니었다. 식어서 나온 반찬이 아니라 따듯할 때 먹는 무나물은 향긋한데 향은 없고 맛있는데 특별한 맛은 나지 않는, 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수분의 맛이었다. 먹을수록 누군가가 생각나는, 담백한 무향처럼 욕심 없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마주 앉아 먹고 싶었다.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천 원 주고 산 무를 반은 무나물, 반은 무생채를 했다. 반찬통에 담았는데 이렇게 예쁠 건 또 뭔지,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나물을 몰랐다. 이제껏 갖가지 양념한 음식에 밀려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나 보다. 흔해서 오래 봐와서 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반찬 아니고 제 소중한 반찬입니다


한때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사치의 끝판왕님께서 

끝장을 제대로 보고서 쓴 책이라 더 기대가 되는 걸까나.      

나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볼까? 

오늘의 나의 돈없이도는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 한 조각과 믹스 커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왜 내게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 싶은 허무한 요즘에

매일 아침에 먹는 샌드위치 한 조각과 믹스커피 한 잔의 여유가 

늘 내게 있었다는 각성을 하는 아침.     

친구가 인스타에 올린 아메리칸 스타일 조식 (무나물과 대비)

<돈없이도>를 읽고 책에 등장하는 ‘인형과 대화하던 친구’가 인스타에 남긴 소감이다. 현재 격한 호응을 하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책에 나온 인물들(동동맘, 주)이지만, 이게 또 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감독이 느끼는 만큼은 아니어도 꽤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 됐어?”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되고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나오는 대사다. 한 달에 한 번 아들을 만나고 양육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아빠는 15년 전에 썼던 소설로 상을 받은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루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 용기다. 끝내 버리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더라도 품고 있는 것이 최선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를 보여주는 영화는 위안을 준다. 아무것도 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높은 곳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아무것도 없다니, 이렇게 살아왔잖아, 사는데 얼마나 많은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지 알잖아. 아침에 눈 뜨는 일부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고 가스레인지를 켜는 일까지 작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이 샀다 아이가, 고마해라.” 

동동맘의 말처럼 필요 없는 시간 따위는 없어. <돈없이도>를 쓰기 위해 나는 그 많은 물건과 허송세월이 필요했던 거야. (지금 진지함)    


우리가 시간을 낭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던 젊음은 이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그 무엇이 돼버렸지만, 책을 읽고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네가 무생물과 대화를 시도했던 이유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신호일지 모른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사실 지금 생각해도 무지 이상한 모습이야) 아무튼 무나물처럼 우리가 찾지 못한 가능성은 많을지 몰라. 너무 평범하고 흔해서 특별한지 모르는 것일지도.

동동맘과 주에게 이렇게 택배를 보냈어요(작은 건 '돈없이도'노트)


작가의 이전글 출판기념회와 붕어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