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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3. 2022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남자

언제나 한량같이 살 것 같았는데

Y와 세 번째 만나기로 한 날, 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 오늘 Y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극장에 어떤 여자랑 같이 있어.”     


영이 봤다는 곳은 시내(동성로)였고, 그때는 1시였다. 나와의 약속은 4시. 그러니까 Y는 나와 만나기 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올 알뜰한 계획을 세웠던 거다. 약간 놀기 좋아하는 학구파쯤으로 생각했는데 과소평가했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오늘쯤 사귀자고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약속 장소에 Y가 먼저 와있었다.      


“사실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어. 과외했던 학생이었어.”     


영의 사자머리를 (안 볼 수가 없었겠지만) Y도 봤고, 할 말을 미리 준비해온 것 같았다. 연애사를 길게 늘어놓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괘씸했지만 사귄 것도 아니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걸로 보일까봐 나는 알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벌떼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안주는 ‘그놈’    

 

Y는 같은 대학, 다른 과 2년 선배로 미팅 비슷한, 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대통합의 자리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Y가 체코로 배낭여행 갔던 이야기를 했다. 체코 사람들은 맥주를 엄청나게 마셔대는데, 먹다 보면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버린다며,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웃겼다. 그때 그 얼굴은 자유롭고 모험을 즐기는 청년의 것이었고, 내가 오랫동안 담아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람은 Y가 아니다. 그 자신도 보지 못한, 낯선 것 앞에서 설레어하고 경험을 사랑했던, 넓은 세계를 동경한,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남자다.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도 자꾸 생각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귀었어도 (늘 그랬듯) 얼마못가 헤어졌을 텐데 완판 된 물건일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미련이 생겼다. 나는 Y를 ‘안경 오빠’라고 별명을 붙이고 술 마시다가 생각날 때마다 두 손으로 안경 모양을 만들었다.     


그날도 주접을 떨고 있는데 주가 외쳤다.

“안경 오빠다!”


우리가 있는 일층 술집 앞으로 안경오빠와 친구들이 지나갔다. 그들도 맨날 붙어 다니는 걸 보면 ‘공대 벌떼’쯤 되는 것 같았다. 나는 튕기듯 일어났다. 그들은 두더지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기는커녕 그를 부를 용기조차 없었던 나는 내내 지켜보다가 그들이 떠난 후, Y의 체온이 남은 두더지게임기를 한번 쓸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 Y한테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나? Y는 여자친구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먼저 전화하지도, 여자친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게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을 만났고 연락이 뚝 끊겼다.     


이상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뒤로 석 달에 한 번, 그러니까 분기별로 그가 전화를 해온 것이다. 여자친구가 군인인가? 공군? 여자친구가 자대복귀하면 나한테 전화하는 건가. 뭐 하자는 거지? 처음에는 속앓이 하고, 그 의도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쳤고 무엇보다 바빴다. 나대로 연애하다가 가끔 그가 연락 오면 만나는 걸로 주기를 만들었다. 그냥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를 찾다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런 모습은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Y는 술 마시면 약간 냉소적이 되었고 달관한 태도로 웃긴 말을 잘했는데, 그런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치열하게 살더라도 쫓기지 않고 언제나 한량같이 살 것 같았다.   

   

Y는 대학원을 갔고, 우리가 안 지도 3년째 접어들었다. 나는 그의 친구들과도 친했고 그도 내 친구들과 친했다. 그즈음 다른 도시로 간 그가 주말마다 대구로 와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내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하는 날에도 계속 전화를 하는 바람에 결국은 늦게 합류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친구들은 Y가 너한테 전화하느라 안절부절못했다는 둥, 너 오니까 이제 웃는다는 둥 하면서 놀려댔다. 

     

술주정뱅이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더 이상 오빠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기 싫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여자친구랑 헤어졌어.”

3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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