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Dec 24. 2022

오성급 호텔과 오만 원짜리 민박

정의할 수 없었던 관계의 마침표를 찍던 날

Y는 이제 나를 ‘고향 후배’쯤으로 생각하는지 명절이면 나를 불렀다. 오랜만에 만난 Y는 들떠있었다.  

      

재력가에 첼로를 전공한 여자는 Y를 만나고 의사 직업을 가진 남자와 파혼했다고 했다. 나한테 여자 얘기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지만, 그 사실은 그의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Y의 흥분된 얼굴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어디가 좋대?”

“내가 좀 스마트하잖아.”          


그가 그어놓은 금 안에 처음부터 나는 없었고, 나는 그저 가볍게 만나서 즐기는 상대였다는 걸 스마트한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다르지 않은 인간에다 나에게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의 제목처럼 Y와 함께한 시간에 이 모든 게 다 있었다. 제대로 미워하지 못했고, 우정과 사랑 중 그 어떤 것도 나누지 못했으며 구애, 결혼 앞에 솔직하지 못했다. 온통 못한 것투성이다. 비겁하게 한 발 물러나 몸을 사렸고 나약함을 들킬까 봐 오기를 부렸다.          


7년이다. Y는 무엇 때문에 나한테 끈질기게 전화했을까. 나 또한 Y를 생각하면 미진한 감정이 따라다녔고 긴 시간 붙잡혔다.           



폭설로 휴교령이 내려 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나도 요가, 독서모임, 중학교 강의가 모두 취소되었고, 뜻밖의 여유에 행복이 밀려왔다.          


눈이 반가운 이유는 이런 의외성에 있지 않을까. 눈으로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린 마술 같은 일 앞에 들뜨는 걸 보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불로 푹 덮인 것처럼 포근한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게으름을 피워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부지런해지기를 ‘선택’한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장을 보고 요리한다. 내가 선택한 부지런한 일상에서 나는 작은 기쁨을 느끼고 동시에 강해진다. 힘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      


행복은 휘발 돼버리는 감정이기에 부지런해야만 가질 수 있다. 화려한 삶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게으르게 한다. 부단히 구하고 찾아다닐 때 행복이란 감정과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20대 나는 부산의 오성급호텔 앞 외제차를 탄 내 또래들을 보고, 오성급 호텔과 오만 원짜리 민박, 그 가격만큼의 행복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30대가 되어 부모님 돈이 아닌, 내 능력으로 호텔 안에 있을 때 뿌듯했지만, 그뿐이었다. 감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고 궁상스러움 속에서도 모닥불처럼 재미가 피어오를 수 있다. 벌떼와 나는 오만 원짜리 민박에서 몇 해의 여름을 보냈고, 기억을 소환할 때마다 끝도 없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배낭을 메고 앞으로 일어날 일 앞에서 두려움과 기대에 차 있던 남자는 불안 없는 확정된 세계에 안착했다는 기쁨에 젖은 남자가 되어 7년 만에 떠나갔다. 나는 그날, 정의할 수 없었던 우리 관계의 마침표를 찍었다.  



Y는 매주 대구에 왔다. 전에는 술 마시기 위해서라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데이트를 위해서였다. 그게 그건지 모르겠지만.     


주의 언니가 신혼여행을 간 동안 주가 가게를 봤다. 벌떼는 화장품 가게 바로 옆 호프집에 모였다. Y도 삼 년 만에 나의 공식 남자친구 자격으로 참석했다. 은지 남자친구가 은지한테 향수를 사주었고 그걸 우리도 뿌려보고 있었는데, 오빠가 나한테 필요한 것 있냐며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콤팩트, 파운데이션, 파우더 세 가지를 골랐고 15만 원을 오빠가 계산했다. 화장품이 든 쇼핑백을 나한테 건네며 그가 말했다.     


“엄마 잘 쓰시라고 해라.”

“어떻게 알았어?”

“너 국산 안 쓰잖아.”     


나는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샀고, 그는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좀 미안했지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대학원생인 그에게 돈 문제로 부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친구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오래 마음고생 했지만 지금은 오빠가 나한테 꼼짝 못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Y는 자기가 병신 된 것 같아서 열받았던 거다. 술자리에 등장하는 나의 과거 남자들처럼 자기도 들먹여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대학원이 있는 도시로 간 Y는 삼 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전화했다.     


“왜 전화 안 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진짜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것도 몇 번씩이나. 다시는 오빠 같은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아. 연락하지 마!”

분하고 억울했다. 


폭설이 내린 우리 동네


작가의 이전글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