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봄처럼 싱싱한 말

꼰대 같은 말일지 모르지만

by 김준정

선우씨는 24세 청년이다.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지난해 대학에 들어갔다. 공대에 진학한 선우씨는 미적분학, 공업수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성화고는 인문계와 달리 수 2, 미적분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다가 방학 동안 과외로 공부방법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알아보다가 나와 만나게 되었다. 나는 선우씨와 수업을 해보니 학습결손은 있지만, 그가 그동안 얼마나 애써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이차방정식, 인수분해를 알아야 하는데, 제가 주는 기본문제로 공식을 익히면 좋겠어요.”

“제가 원했던 게 이거예요. 이 문제에 인수분해가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기본 문제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저는 00 책에서 문제를 뽑았는데, 이 책으로 공부해 보세요.”


나는 미적분학에 필요한 고등교과단원을 알려주고,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선우씨가 책을 찾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줬다. 나는 선우씨에게 수학은 이해해도 문제를 풀 수 없으면 소용없으니 공식과 해설을 눈으로 읽기보다 손으로 쓰기를 권했다.


그렇게 수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선우씨는 들어올 때부터 지친 기색이더니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의욕이 떨어질 때 어떻게 하세요?”

나는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쫓기는 기분이겠네요.”

“맞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지친 게 아닐까요? 전력질주를 한 뒤에 휴식도 필요하잖아요. 목표가 생겼다고 달리기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먼 길이라면 쉬어가기도 해야죠.”

선우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했다.

“선생님 말대로 지친 게 맞는 것 같아요. 공모전 준비로 밤을 새우고, 체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운동하고, 학점 관리를 하기 위한 공부에다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거든요.”

“저도 제 일이었다면 나의 상태를 알지 못했을 거예요.”




선우씨는 한 기업에서 주최하는 앱개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당선이 되면 인턴쉽기회가 주어지고, 업무 성과에 따라 정규직 채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회사가 많아서 이런 식으로 이력을 쌓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한 가지더 말씀드리자면, 모임을 만들어보시면 어때요?”

“모임이요?”

“공모전을 준비하는 모임 외에 독서모임에 가입해 보시면 어때요?”


나는 한 개의 독서모임과 스터디를 하고 있다. 스터디를 함께 하는 신은경, 툰자님은 배지영작가의 에세이 쓰기 수업에서 만났고 나처럼 오랫동안 사교육에 종사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두 분에게 교육대상을 학생에서 성인으로 확장하고, 우리가 해온 일이 다른 분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공부하는 모임을 하자고 했다.

지난 1월에 한길문고에서 세 명이 합동강의를 하기도 했다. 주제는 새 학년 교재선택과 학습고민이었다. 말을 꺼낸 건 나지만, 미리 질문을 받아서 답하면 되겠지, 하고 태평하게 있었는데 툰자님이 ppt 만들자고 한덕분에 준비할 수 있었다. 막상 강의를 시작하니 예상보다 질문이 없어서 ppt가 없었으면 묵언수행을 할 뻔했다. 뭘 질문할지 몰랐던 청중도 공부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그 안에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선우씨에게 이런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혼자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도 허전함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사는 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지금 친구랑 같이 공모전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죠? 내가 지치면 친구가 손을 잡아주고 친구가 힘들 때 기다려주고 그러면서 가는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남는 건 결과보다 서로 나눈 온기와 위로인 것 같아요.”


(꼰대 같은 말이었나? 뒤늦게 반성을 해본다.)


“저는 종종 독서토론을 하다가 글감이나 풀리지 않던 부분의 실마리를 찾기도 해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책과 독서모임이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실어줄 거예요.”


선우씨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리던 어느 날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선우씨는 마지막 수업에서 도움을 받고 싶을 때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 도움이 수학이 아닐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나는 언제든 환영이라고 했고, 공모전 준비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더니 선우씨도 공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개학하면 멘토멘티 봉사활동을 신청하고, 내 안에 갇혀있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에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니, 봄처럼 싱싱한 말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걔들 시험 점수는 다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