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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y 12. 2023

귀 파줄까?

거역할 수 없는 유혹, 너의 귀와 마음이 막히지 않게

연휴 첫날, 대구로 가는 버스를 예매하고 택시를 불렀다. 내가 먼저 내려가서 택시에 짐을 싣고 앉았는데 바로 뒤따라 나온 초밥이가 오지 않았다. 얘는 뭘 꾸물대는 거야, 하는데 초밥이가 나타났다.     


"왜 전화 안 받아. 현관문 안 잠겨."      


어째서 이런 일은 이 아이에게만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은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날아갔다.   

   

현관문 번호키는 삐리리-잠금장치-'닫혔습니다' 음성 안내, 이 세 단계를 거치는데 삐리리 다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고 닫기를 거듭해도 마찬가지. 기다리고 있는 택시, 20분 뒤에 출발하는 버스 때문에 초조한 사람 심정은 나 몰라라 하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번호키를 나는 노려보다가 후, 심호흡을 한번 했다. 뭘 알아서가 아니라 뭐라도 해야 해서 건전지 박스를 열어 건전지 하나를 뺏다가 도로 꽂아봤다. 그 순간 기적처럼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게 아닌가. 마치 장난 한번 쳐봤어 하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번호키에게 일단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하고 나는 택시로 돌아갔다.      


초밥이가 모든 걸 포기하고 택시에서 짐을 빼고 있었다.     


"닫았어, 닫았어!"

"진짜?"

"기사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번호키로 이렇게 스릴 넘치기는 처음이었다. 극적인 반전을 거쳐 택시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15분 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하는 미션이 남아있었다. 출근시간이라 차가 밀렸고 신호는 연이어 첫 번째에 걸렸다.      

해피엔딩의 서막이 비추는지 택시는 버스 출발 3분 전, 터미널 앞에 섰고 나는 만원을 기사님에게 건넸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버스 좌석에 앉기까지 성공하고 나서야 나는 현관문 잠그기 성공담을 말할 여유가 생겼다.      


"너 포기하고 택시에서 짐 빼고 있더라."      


크크크크, 일촉즉발 상황도 지나고 나면 왜 이렇게 웃기는지. 우리는 버스 안이라 소리를 크게 내지도 못하고 서로를 두드리면서 웃느라 혼났다. 번호키가 오 분만 늦게 작동했어도 택시를 보내고 버스 예매한 돈도 날렸을 거다. 아마 나는 신경질을 내며 대구 가지 말자고 했을지 모른다. (이 말에 초밥이도 동의했다)     


"택시비 4,800원 나왔는데 엄마가 5,000원 내고 '잔돈은 괜찮습니다' 하는 줄 알았어."

"그렇게 기다리게 해 놓고 200원 잔돈을 안 받겠다고 당당하게 말했으면 진짜 웃겼겠다." 

“잔돈을 괜찮습니다.”     


초밥이가 내가 말한 걸 흉내 냈고 또 한참 웃었다. 이럴 때 나는 초밥이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좋을 때는 누구나 다 좋지만, 곤란한 상황에서 서로 자극하지 않고, 웃을 수 있으려면 타고난 성격이 맞아야 한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부딪치지 않고 넘어가도 참은 기억이 삶의 연속성안에서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된다. 물론 나와 초밥이의 관계가 원만하다면 그건 8할이 초밥이의 공이지만.   

 

친구들이 초밥이한테 “네가 화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길래, 내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가 그 사람을 바꿀 수 없는데 화내서 뭐 해.”     


나도 모르게 초밥이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감정을 쌓지 않을 수 있잖아.”

“나도 마음대로 화내고 우는 애들을 보면 부럽기도 해. 엄마도 그렇고.”     

이건 나를 메기는 말인가 싶지만,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내보내야 하는 거 아닐까?”     


초밥이가 감정조절 못하는 애미 때문에 속에 쌓인 게 얼마나 많을까 싶어 미안했다. 후회하고 자책하다 보면 내가 이제야 사람이 되나 싶다. 나와 다르지만 이해되고, 그 사람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반성하고 고쳐나가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잘 맞는 관계인 것 같다. 


그렇지만, 초밥이한테 나는 잘 맞는 사람일까?      




“귀 파줄까?”     


이보다 유혹적인 말이 있을까. 둘 중 한 명이 이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은 냉큼 귀이개를 찾아서 침대에 눕는다. 귀를 맡긴 사람은 귀 파는 사람의 무릎에 누워 휴대폰 조명을 비춘다. 주로 노약자 우대 원칙에 따라 초밥이가 먼저 내 귀를 판다.     

 

“와, 대박, 속이 꽉 막혔어.”

“니가 안 해줘서 그래.”

“나이 들면 귀지도 늘어나나?”
“오늘밤에 복도에 박스 깔고 잘래?”   
  


귓속과 마음속이 막히지 않게 서로 파주면서 살아보자고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대구행'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는 2편에서 이어집니다)

'대구행'에 성공하고 차린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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