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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11. 2023

성시경 알아?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누스 출판사 편집자에게 톡이 와있었다.    

 

“다음 달에 출판사 창립기념일이어서 작가님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있어요. 각인을 새긴 수저세트를 드리려고 해요. 숟가락, 젓가락 두 짝에 새길 단어 세 개를 알려주세요.”   

  

각인을 새긴 수저라, 기발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뭘 새길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식사준비를 할 시간이라 냉장고에서 영계 두 마리를 꺼냈다.     


어제 동네 마트에 갔더니 초복이라 토종닭이 있길래 백숙이나 할까 하고 집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그거 제가 사려고 빼 논 건데요”라고 했다. 그분은 토종닭을 찜해놓고 정육점 사장님에게 주문한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고기를 썰고 있던 정육점 사장님이 말했다.     


“영계도 괜찮아요. 원래 백숙은 영계백숙이잖아요.”     


할 수 없이 나는 토종닭의 두툼한 다리에 미련을 거두고 병아리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마늘, 대파, 황기를 넣고 닭을 푹 삶아서 건져내고 야채와 불려놓은 찹쌀을 넣어 죽을 끓였다. 닭의 작은 가슴살을 찢어서 죽에 넣었다. 다 자라지 못하고 백숙이 되어버린 닭에 대한 미안함 한 조각, 튼실한 씨암탉으로 몸보신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 한 조각으로 죽을 완성하고 초밥이를 불렀다.     


나: 백숙했어. 나와 봐.
나는 초밥이한테 다리 세 개를 주고 갈색 살을 뜯어 주었다. 참새 날개 같은 건 내가 먹었다.      

나: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뭐야?
초밥: 알탕.

나; 알탕이 일등이라고? 근데 별로 해준 기억이 없네. 내가 안 좋아해서 그랬나? 그다음은?
초밥: 마라탕, 치즈돈가스.
나: 마라탕은 내가 해준 적 없잖아. 다시 해.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 중에 일등은?

초밥: 미니갈비김치찌개


아, 생각났다. 갈비를 뜯느라 손과 입 주변에 빨간 국물을 묻히고, 밥에 김치를 척 올리고 먹던, 초등학생인데 먹는 건 아저씨 같았던 초밥이.   

  

초밥: 아, 닭볶음탕도 있어.

그래, 닭볶음탕도 자주 해줬지.    

 

편집자님에게 톡을 보냈다.     


‘알탕, 미니갈비김치찌개, 닭볶음탕’으로 새길게요.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내년부터 아빠와 지내기로 해서

기념하고 싶었는데, 함께 먹은 음식을 수저에 새기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자기의 노고를 기억하라는 쿨하지 못한 엄마거든요. ㅎㅎ     


열흘뒤에 수저가 왔다. 수저는 고급지고 손 편지, 연필까지 감동이었다. 손수 포장해서 일반 택배박스가 아닌 노란 박스에 담은 아날로그 감성까지 마음에 들었다. 주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는 선물을 받는 게 얼마만인지.     

감성 넘치는 마누스 출판사 창립기념일 선물

초밥이한테 자랑하려고 수저를 들고 갔더니 초밥이는 '싸이 흠뻑쇼'를 보러 간다며 외출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초밥이는 슬쩍 보더니 수저네, 하고 고데기에 집중했다.     


나: 글자도 있어. 읽어봐.

초밥: 어, 재밌네. 엄마! 게스트로 성시경 온다? 성시경 누군지 알아?

나: 내가 왜 몰라. 성시경 우리 오빠거든! 싸이하고 성시경 다 내 친구들이었거든!

초밥: 그래? 엄마 갔다 오게.

   

그렇게 헐벗고 집을 나서는 초밥이 등뒤로 나는 못났다, 못났다, 중얼거렸다.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건재한 싸이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초밥이 사이에서 구질하게 과거를 붙잡고 있는 내가 못나고 못나서.  

   

(이 글을 초밥이한테 읽어줬더니 끝이 이상하다고, 갑자기 못났다, 못났다, 가 왜 나오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건 네가 배경지식이 없어서 그래. 엄마 세대들은 ‘성시경 알아?’ 이 대목에서 터지게 되어있어”라고 말해줬다.)     


"엄마 모자 빌려가도 돼?" 역사를 모르는 분의 질문






#마누스출판사

#창립기념일선물

#쿨하지못한엄마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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