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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16. 2023

그려, 자주 들여다봐줘

과외하는 학생이 두 명이 그만뒀다. 한 명은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고, 한 명은 수능을 보지 않는 고3이어서다. 생활비 걱정은 걱정인데 수업이 일찍 마쳐서 당장 놀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랜만에 초밥이와 단합대회를 할까 하고 학원에 간 초밥이한테 톡을 했다.    

 

“학원 언제 마쳐? 놀자.”
“공부해야 돼.”

“스테이 가자.”
“좋아.”     


스테이는 보세 옷가게다. 나라는 존재로는 더 이상 초밥이에게 어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가 대견했다. 초밥이가 학원 선생님한테 말하고 수업 두 타임 중 하나만 하고 나왔다.   

   

“원피스 봐둔 거 있거든. 한번 봐줘.”     


그렇게 말하고 옷가게로 갔다. 하지만 상의는 입어볼 수 없고, 원피스도 상의가 포함되기 때문에 시착이 불가능했다. 요즘은 옷가게 어디든 그렇다는 게 초밥이 설명이었다. 옷을 입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사나. 원피스는 다시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옷을 구경했다. 그러다 얇은 청으로 된 통바지, 나시 세트를 발견했다. 나시는 입어볼 수 없어서 바지만 입어봤다.     


“그냥 그렇다. 그지?”

“아니, 괜찮은데?”

“네가 사고 싶어서 그래?”
“그렇지.”

 

가게에는 손바닥만 한 면티부터 가방, 양말 같은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이 있었다. 그런 걸 구경하는 게 백만 년 만이었다. 그러다 샤넬풍 작은 가방을 발견하고 들어보면서 말했다.    

 

“엄마는 이 나이쯤 되면 샤넬 같은 거 척척 걸치게 될 줄 알았다? 근데 보세 가방도 들었다 놨다 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거 있지.”     


내 거지만 초밥이가 마음에 드는 청 나시, 바지세트와 샤넬풍 가방을 사고 가게를 나오는데, 초밥이 얼굴이 굳어있었다.     


“너 화났어?”

“그런 말을 왜 해?”

“뭐?”

“보세 가방도 살 돈이 없다느니 하는 말.”

“직원들 기분 나쁠까 봐?”
“밖에 나와서 돈 없다는 말을 꼭 해야 돼?”
 

나는 돈이 없다기보다(없기도 하지만) 소비에 관한 달라진 생각을 자조적 표현기법으로 구사한 건데, 그게 초밥이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나 보다.      


샤넬 매장은 아니지만 딸과 함께 작은 소품을 구경하는 게 좋다고, 과시하고픈 마음 없이 소박하게 자잘한 재미를 느끼는 게 좋다고, 그걸 위해 싸게 먹히는 삶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는데.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다음부터 안 그럴게.”     


초밥이와 나 사이에 흐르는 30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느꼈다. 무수히 흘러내린 물결 같은 변화를 말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살이 돌아 돌아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있겠지.   

보세 가게에서 산 샤넬'풍' 가방

   

옷가게를 나와서 우리는 단골 고깃집에 갔다.    

  

“우리는 여기가 맞아. 예전보다 더 맛있어졌다.”

“맞아.”

새로 생긴 삼겹살 가게를 두고 고민했는데 여기 오길 잘했다.     


초밥이는 주말에 캐리비안 베이를 간다며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 조금만 먹겠다고 했다. 항상 주문하는 2인세트(700그램) 말고, 단품으로 2인분(400그램)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단품은 추가 주문만 가능하다고 해서 남으면 싸가자며 2인 세트를 주문했다. 하지만 남기는커녕 모자랐다.     


“냉면도 먹어야지?”
“당연하지.”   
  

커다란 그릇에 나오는 냉면까지 싹 비웠다. 먹는 데만 이렇게 집중하기는 오랜만이었다. 

  

냉면 양도 많았는데 우리의 양도 많았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나?”     

초밥이는 내년에 아빠랑 살게 되면 고등학교는 공부할 게 많아서 자주 못 올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무슨 고시공부라도 하러 가냐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하니까 참았다.     


“방학 때만 만나자.”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봐야지.”

그려, 자주 들여다봐 줘,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정당당하게 맥주잔 부딪치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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