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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15. 2023

함께 흘러가는 기분

나와 사촌인 분희 언니가 일박이일 일정으로 우리 집에 방문했다. 첫날은 밀린 이야기를 하고 저녁에 집 근처 천변을 산책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언니와 월명산을 구석구석 두 시간 삼십 분을 돌았다. 언니는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운동한 거라고 했다.     


나: 청국장 맛있는 집 있는데 갈까? 
분희언니: 어제 수육재료 사논 거 있잖아. 집에서 씻고 편하게 먹자. 혹시 너 먹고 싶으면 가고.

나: 아냐. 언니 배 고플까 봐 그러지.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는데 벌써 시간이 11시였다. 사실 언니가 배 고플 것 같다는 건 핑계고, 살짝 귀찮았다.      

나: 내가 지난번에 사간 단팥빵 맛있었어? 형부 드리게 살까?
분희언니: 유명하다니까 한 번은 먹을만하지만, 특별한지는 모르겠던데?


언니는 와인, 김치, 무말랭이, 블루베리, 텀블러, 시아버지가 무농약으로 농사지은 감자와 복숭아, 머드팩, 폼클렌징, 책 등등 무슨 내가 필요할만하다 싶은 건 다 가지고 온 것 같았다. 그런 언니를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서 수제로 만든 말차치즈케이크를 포장해 왔다.    


집에 가자마자 고기를 삶고 밥을 했다. 고기가 익는 동안 후딱 샤워하고 청국장과 오이무침을 만들었다. 

    

분희언니: 그새 이걸 다했어? 너 손이 정말 빠르다.

나: 나는 일단 가스레인지를 켜는 것부터 시작해. 시동을 거는 거지. 다시 끄더라도 일단 냄비나 프라이팬을 달궈놓는 거야.
분희언니: 나는 재료를 다 꺼내서 손질하고 가스레인지를 제일 마지막에 켜는데.     


상을 차려놓고 보니 역시 집이 편했다. 잠깐의 귀찮음을 누르고 느긋하게 먹는 게 좋았다. 밥을 먹은 후에 케이크를 먹었다. 언니는 케이크가 달지 않아서 맛있다며, 냉동실에 얼려놨다가 녹차와 치즈 둘 다 좋아하는 큰딸을 줘야겠다고 했다.     

 

느긋하게 먹어서 좋은 집밥


분희언니: 너 이번에 낸 책 제목이 뭐라고 했지?

나: <돈없이도> 내가 안보내줬나? 집에 있으니까 줄게. 근데 언니가 어떻게 읽을지 부끄럽다.


<선생님의 책꽂이>는 분희언니가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출판한 책이다. 수록된 100편 중 세 편을 언니가 썼다.     


여자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부터 먼저 하고, 남자는 머리에서 정리가 되고 나서야 움직이는 지겨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여자의 가슴에서, 남자의 머리에서 만들어진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말이 되어 나오면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할수록 말문이 막히는 답답한 부부싸움을 멈추지 않고 내 고집을 부리고 상처 주고 상처받기를 반복하였다. 나를 버릴 수가 없었고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함께한 세월이 쌓여 가면서 나에게도 있는, 그러나 모양은 다른 어릴 적 그의 상처가 보이고 같이 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기며 그의 빛깔을 존중하며 부족한 대로 함께 가려 한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요즈음에 와서 문득 든 마음인데 그가 곧 나인 것 같다. 그냥 이 마음이 어느 날 찾아와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이다.    
 
-김분희, <사랑할 권리는 있지만 사랑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난다. 내가 모르는 언니의 애써온 시간과 그럼에도 내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다.


<선생님의 책꽂이>, 청양교사독서모임 간서치 지음

분희언니: 나는 안전지향적인 사람이라 변화를 두려워해. 너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어? 내가 볼 때는 대단한 용기 같아.

나: 나한테는 그대로 있는 것이 포기고, 지금의 선택이 도전 같은 거였어. 하지만 모르겠어. 아이 아빠와 헤어지지 않고, 내 문제로 받아들였다면 어땠을지. 아냐. 그때의 나라면 그냥 나를 놔버리고 되는대로 살았을 것 같아.     


나: 언니는 또 책 낼 생각 없어?

분희언니: 글 쓰는 거 힘들잖아. 책도 열심히 안 읽어. 그냥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책이 좋아. 읽고 있으면 위로받는 기분이야. 위로받기 위해 읽는 것 같아.  

   

나는 어른들에게 “분희 어릴 때와 똑같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언니는 내가 큰집 마당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언니를 동경하고 결혼해서 떠난 언니를 그리워했던 시절을 거쳐 나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12년의 격차를 두고 서로가 보낸 시간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언니 옆에 나란히 선 것 같아서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다가왔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을 때 나는 분희언니를 찾아갔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과 언니가 있는 공주는 차로 한 시간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대구에서 충청남도 공주는 아주 먼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언니 머리가 그게 뭐야!”     


마중을 나와 있는 언니에게 내가 한 첫마디였다. 지금의 내 나이인 40대 중반이었던 언니는 염색을 하지 않은 희끗한 머리에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언니는 이십 대였기 때문에 중년의 언니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아, 너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지?”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집에 들어서니 근처에 사는 시부모님과 형부, 고등학교를 다니는 큰 딸, 중학생인 작은딸과 식사 중이었다. 언니네 가족의 평범한 주말 모습 같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나와 초밥이도 거실에 차린 밥상 한쪽에 앉아서 주메뉴가 수육인 점심을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큰 딸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겨서 나갔고 시부모님도 댁으로 돌아갔다. 분희언니와 나는 식탁에 앉아있었고, 초밥이는 언니와 놀고 싶은지 언니 방문 앞을 기웃거렸다. 형부가 오라고 불러서 블루마블 게임을 하자고 하자 초밥이가 그 옆에 앉았다. 조금 이따 중학생 언니도 나와서 같이 했다. 그날 나는 언니와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부터 언니와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나왔다. 이제 나도 흰머리를 감출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딸은 중학생이 되었다. 가족과 고향, 정서의 뿌리를 함께 하는, 세상을 판단하고 알아가는 토대가 같은 우리가 삶의 한 고개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함께 흘러가는 기분이다.  


p.s 언니가 책모임 회원들에게 선물한다며 <돈없이도>를 스무 권 주문하고, 선물할 분들의 이름을 적어주고 갔다. 내가 책을 보내고 언니가 최은숙 선생님의 소감을 전해주었는데, 다시 읽어도 너무 고마운 말씀이어서 여기 옮긴다.


"분희샘이 준 김준정 작가의 돈없이도? 다 읽었어요. 가벼운 에세이인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어요. 책을 펼쳐 드니 끝까지 읽게 되네요. 완독한 독자는 돈없이도 입도한 거랬어요 ^^ 좋은 책이에요. 게다가 문장이 정확하고 유머감각까지! 이런 유머가 어려운 상황을 훌쩍 넘게 하는 뜀틀 같은 거죠. 어른스러운 힘이고.. 저는 해방감각이란 말을 선물로 얻었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최은숙 선생님은 책을 여러 권 쓰고 해마다 아이들과 시집을 내는 작가님이라고 했다. 

유머감각을 되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월명산 산책 중에 만난 진돗개 삼 형제를 사진 찍는 나, "너 뒷모습은 대학생이다"라며 나를 찍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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