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Aug 17. 2023

엄마를 미워해

나: 치맥 어때?

초밥: 싫어.

나: 그럼 마트 가는데 따라가 줘. 짧게 끝내줄게.

초밥: 아, 그냥 혼자가.

나: 오늘 수업하는 거 말고 사람하고 말 한번 못 섞었어. 이 집에 나 혼자 살아?

초밥: 나 없을 때를 대비해서 엄마도 적응해야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방바닥에 늘어져있는 옷을 주섬주섬 주었다. 초밥이는 그런 나를 지켜보더니 침대에서 몸을 분리했다.


초밥: 가, 그럼.     


마트에 갔더니 맥주 말고도 살 게 많았다. “너 있을 때 계란 사야겠다” 하고 계란 한 판을 집었고 청국장, 메밀국수 등등을 골랐다.     


나: 여기다 수박까지 샀다고 생각해 봐. 보미 목줄까지 들고. 장 보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고. 장 볼 때 진짜 같이 가야 돼.

초밥: 말을 하지. 엄마가 맥주만 산다고 했잖아.     


집에 돌아와서 내가 식탁에서 맥주 캔을 까자 초밥이는 자기 방으로 복귀했다.    

  

잠시 후 내가 브런치 글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초밥이가 나오더니 스윽 맞은편에 앉았다.     


초밥: 전에 말했던 전학생 있잖아. 나하고 비슷한 점이 많아. 키랑 몸무게가 같고 애들이 재미없다고 하는 게임을 하는 것도 나랑 같아. 걔네 엄마, 아빠도 이혼했는데 아빠랑 살아.

나: 진짜 똑같네? 근데 아빠 잘생겼어?

나는 정말 그것이 궁금했는데 초밥이가 싸늘한 눈으로 쳐다봤다. 

초밥: 사진 봤는데 평범한 아저씨야.

나: 내가 직접 판단하고 싶은데 사진 없어?

초밥: 없어.

하긴 친구 아빠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는 다음부터는 준비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 근데 너의 아버님 외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초밥: 아빠는 동급최강이지. 나는 아빠 나이에 그 정도 되는 사람 한 번도 못 봤어.

나는 맥주가 목구멍으로 잘못 넘어가서 헉헉거렸다.

초밥: 엄마가 마지막으로 본 아빠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볼 때 그래.   

  

그러고 보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알던 사람도, 그때의 나도 없었다.           




7년 전,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을 때 아이는 9살이었다. 남편과 나는 주말부부였다. 금요일에 아빠가 오지 않는 걸 아이는 이상하게 생각했고, 이유를 나에게 물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안 좋아서 같이 안 살기로 했어. 아빠는 이제 안 올 거야. 그런데 이건 엄마가 무조건 잘못한 거야. 엄마가 미안해. 엄마한테 화내도 되고, 엄마를 미워해도 돼. 아무 때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뭐든 말해줄게. 그런데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알아줘.”     


지금 생각해도 아이에게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부모가 더 이상 자기가 알던 모습으로 있어주지 않는다는 건 기반이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그게 전부일 수 있는데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이가 내 눈치를 보면서 상상하는 것보다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게 낫다고,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났을 때 엄마가 자기를 존중해 줬다는 건 알기를 바랐다. 이건 전적으로 엄마가 잘못한 일이고, 용서든 원망이든 자기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스스로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부모로 인해 모든 게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후로 내가 아이를 대한 방식은 이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잘한 일인지는 지금도 확신은 없다.

   

나도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은, 나를 설명하는 것들을 모두 잃고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세상과 떨어져서 외로워질 거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릴 것 같았다.    

 

그건 처음에서 오는 불안이 아니었을까. 남편과 헤어지는 일, 그것이 그때까지 내가 해온 일 중에 유일하게 내가 한 선택이었다. 대학을 간 것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것도 나한테 맞는 일인지 따져보고 결정했다기보다 중학교 다음에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무리에 휩쓸려 거기까지 왔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난생처음 하는 선택에서 오는 두려움을 읽었고, 아이 이야기하며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를 보았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던 건 맞지만, 내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과 욕구를 찾아낼 지식이 없었다. 몰라서 두렵고 막막했다.     


삶의 기로마다 고민해서 선택하고 그 결과에서 배운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남들과 달라진다는 게 겁이 났다. 남들과 달라진다는 걸 낙오나 실패로 받아들였고, 참담함에 빠져버렸다. 위험하지만 끌리는 일을 하고, 결국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고 나이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긴 일이 없었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선택일 때 자부심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그런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이 일이 다음에 어떤 지식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기대와 호기심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경험과 사고가 빈약했기 때문에 내가 내면화해 온 엄마의 삶을 가지고 와서 아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답다는 게 뭘까. 이 말에는 엄마, 며느리, 아내로만 살기를 강요받았던 여성이 있다. 지금도 그 역할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전과 비할 수는 없다. 엄마답다는 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현재의 실패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탐구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엄마. 그런 엄마야말로 딸이 또다시 엄마답다의 틀에 묶이지 않게 하지 않을까. 딸이 살았으면 하는 모습을 내 삶에서 구현해 내는 엄마가 바로 엄마다운 엄마가 아닐까.     


얼마 전에 초밥이가 할머니를 만나고 와서 해준 얘기다.     


초밥: 할머니가 아빠 없을 때 엄마하고 아빠가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내가 이렇게 말했어. ‘엄마는 아빠하고 살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여’라고.

나: 할머니가 뭐라고 하셔?
초밥: 잠시 가만히 있더니 행복하면 됐다고 그랬어.
    

7년 동안 많이 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흘러가는 기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