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나 지났어.”
초밥이가 마요네즈의 유효기간을 보며 말했다.
“거 날짜 되게 빨리 가네. 근데 한 달 정도 지난 건 먹어도 되지 않나?”
“나는 안 먹어.”
그러면서 초밥이는 마요네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늘 사 와야겠네.”
그렇게 웅얼거리는데 으잉? 기시감이 들었다.
유효기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 또 한 명의 사람, 나의 전남편, 초밥이 아버님이 생각났다.
“뭐야? 석 달이나 지났잖아?”
초밥이 아버님이 그렇게 말하며 마요네즈를 버리면 내가 그랬다.
“거 날짜 되게 빨리 가네. 근데 날짜 좀 지나도 먹어도 되지 않나?”
“석 달이나 지났다고.”
“오늘 사 와야겠네.”
그렇게 웅얼거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일을 하고 있었고 나의 노동강도가 더 컸다. 엄마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주중에 딸을 양육하는 것도 나였다. 유효기간이 지난 마요네즈에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미안한 것처럼 행동했을까.
어렸을 적 부모와 어른들을 보고 배운 대로 반응했던 거다. 우리의 맥락에서는 맞지 않는데도 과거의 성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나온 행동이었다. 결혼생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일은 착실하게 쌓여서 그 많은 마요네즈를 다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마요네즈 사건이 우리 부부의 맥락에서 부당했지만, 나라는 인간 또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역사와 문화의 맥락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것과 떨어뜨려놓고 살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나를 이해한다는 건 세상을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인지 모른다. 내가 결혼생활이 힘들었던 건 나와 세상을 몰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것이 이제와 드는 생각이다.
나라는 사람은 마요네즈를 먹을 때 고시대 유물처럼 보이는, 정말 꺼림칙한 경우가 아니면 유효기간은 확인하지 않는다. 한 달 아니 석 달 정도 지난 건 그냥 먹는다. (나만 그런 거 아니죠?) 만약 나 같은 사람을 배우자로 만났다면 별문제 없이 살았을 수 있고(병에 걸렸을라나) 오히려 상대에게 이런 것 좀 챙기라고 잔소리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유효기간을 귀신같이 확인하는 초밥이로 이어졌고, 나는 추궁당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초밥이가 유효기간을 확인하는 건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 미성년자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에미한테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도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나는 한 살 많은 오빠를 두었고, 그 시절 당연했던 문화대로 성별 때문에 차별을 겪고 자랐다. 주로 초등학교 때까지 우리를 돌봐준 할머니한테서였다. 오랫동안 그 기억을 떠올리고 서운해하고는 했는데 문득 할머니도 관습에 젖어 행동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단가족사업으로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노동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여자보다 힘이 센 남자가 우대를 받았다. 여자는 결혼하면 노동력 손실이 일어나지만,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가 생기고 자식이 생겨서 노동력이 커진다.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그전 세대의 문화가 답습되어 여전히 아들을 선호했던 거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왔을 때다. 내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아빠가 화를 냈고, 오빠한테 없는 통금시간을 지키라고 하는 아빠에게 내가 대드는 걸 보자 할머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음 달리 묵었나, 와카노”라고 했다. 그 눈빛에는 나를 믿었는데 어째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해 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외면해 버렸다. 그때 할머니는 팔순이 넘었고 내내 누워계실 정도로 기력이 많이 약해졌을 때였다. 내가 외출준비를 하느라 드라이기를 한참 들고 있자 “팔이 얼마나 아플꼬” 중얼거리며 내 방 앞을 왔다 갔다 하던 할머니.
자식들한테 받은 용돈을 모아서 꼬깃꼬깃한 지폐로 백만 원을 채워서 오빠한테 준 할머니. “가시나, 오빠 다리 타 넘지 마라”하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지만, 그저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한 것뿐, 할머니가 마늘을 까면 조잘거리며 함께 마늘을 까고, 할머니가 밥을 하면 으레 걸레를 들고 방을 닦던 나를 마음속으로 귀엽게 여겼을지 모른다. 나도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의 그 천진한 모습과 함께 한 시간이 소중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도 소중한 걸 나누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알지 못하면 내가 본 대로 흉내 내며 사는 것 같다. 어디에 근거한 것이지 나의 상황에 맞는지 따져보지 않고 그저 남을 따라서 사는 것 같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돌아볼 때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점차 내 안의 원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랑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를 바라본다.
*요즘 책 작업을 하느라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혹시 궁금해하는 독자님들 계실까 저도 궁금했는데요. ㅎ 이번 기회에 저의 글쓰기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독자님들 연휴를 마치고 편안하게 일상에 복귀하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