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Jan 05. 2024

기준이 되는 사람

내가 요런 못난이 공주를 낳았구나

오늘 채움작가들 모임이 있었어. 나영샘이 출산일인데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참석했더라고. 나영샘 알지? 엄마 책 <돈없이도> 표지 디자인 해준 작가님. 자연스럽게 아이 낳는 이야기로 흘렀지. 나영샘이 자연분만과 제왕절개수술 중에 고민이라고 해서 내가 그랬어.   

  

“수술하면 나중에 다들 자연분만한 경험을 말할 때 왠지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랬더니 다들 아니라고, 애 낳는 건 다 힘들다고 해줬어. 그래도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겁이 나서 수술하겠다고 해서 의사한테 “자연분만 가능한데 왜 그래요”라는 말을 들었던 나는 좀 찔렸어. (너도 알지? 엄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거) 그 고통이 뭘까 (이제 와서) 궁금하고 말이야.     


나영샘은 아들을 출산할 예정인데 다들 하나같이 딸이 좋다고 하는 거야. 아들만 있는 사람, 딸만 있는 사람, 아들과 딸 다 있는 사람 모두. 나영샘도 딸이기를 바랐다고 하는 거야.  

   

나: 아냐. 아들도 좋아.

나영샘: 선생님은 딸이 있으니까 그러죠.

나: 딸의 안 좋은 점을 말해볼게. 오늘 아침에 애가 택시를 타는데 걱정이 되어서 두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기사님 드렸어.      


아직 해가 안 떠서 캄캄한데 7시에 네가 학교 가야 한다고 했잖아. 얼마 전에 작은 접촉사고가 나서 차를 정비소에 맡겨서 내가 데려다줄 수도 없었지. 너랑 같이 내려가서 기사님한테 두유를 드린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서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서야. 네가 축제 부스 꾸미느라 밤늦게 왔던 날, 옆집에 사는 현우와 같이 택시를 탄다고 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더라고. 이건 현우 어머니는 모르는 불안일 거야.   

  

너도 알겠지만 엄마는 네가 택시 타는 게 싫어. 특히 밤에 타는 건 더욱. 선량한 택시기사님들을 잠정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도난택시일 수 있고 밀폐된 공간에서  범죄를 어떻게 계획했을지 모르잖아. 힘이 약한 여성을 범죄대상으로 하는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     

 



물론 엄마는 너 같은 딸이 있어서 좋아.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위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부모의 말상대를 해주고 감정을 읽어주라고 자식이 있는 건 아니니까. 만약 네가 아들이었다면 남자에 대한 지식이 생겼을 것 같아. 남자를 어린 시절부터 키우면서 몸으로 얻은 지식으로 여성과 나의 지난 경험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너를 키워본 경험 덕분이야. 자식은 그냥 기준이 되는 것 같아. 주어진 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어. 시작점이 그렇구나, 이 아이가 이런 면을 갖고 있구나였어.     


네가 전국 같은 연령의 아이들 중에 몸무게로 상위 3퍼센트 찍은 날, 나는 너의 외모에 대한 기대를 버렸잖아. 제왕절개 수술했던 의사도 너의 머리둘레를 보더니 자연분만했으면 힘들 뻔했다고 했어. 내가 몰래 차트를 넘겨보니까 다른 아기들은 앞자리가 3인데 너만 4로 시작하는 거 있지. 35,36,34 중에 독보적인 43cm 아기, 그게 바로 너였어. 하지만 내가 머리 큰 아기를 낳았구나 하는 걸 알았을 뿐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어. (조금 유감스러웠지)     


엄마는 백화점에 진열된 유아용 공주원피스를 보면서 나도 딸을 낳으면 입혀봐야지 했었거든? 그런데 말도 마. 너한테는 조금도 안 어울리는 거야. 웬만하면 예쁘다고 하는 판매직원조차도 너를 보고 할 말을 잃더라고. 엄마는 드레스를 입은 너를 보는 순간 내가 요런 못난이 공주를 낳았구나 하고 귀여워죽을 뻔했어. 엉덩이와 허벅지 품이 큰 단지 바지와 고무신이 찰떡인 내 새끼, 고무신 위로 통통한 발등이 올라온 게 미치도록 귀여웠지. 너도 내가 연달아 두 개 사준 그 분홍 고무신 생각나지?      


자, 이제 네가 SNS에 예쁜 척하는 사진을 올리면, 엄마가 “누구?” “이러지 말자”라는 댓글을 왜 다는지 알겠지?     


예전에 내가 전업주부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 편이 네가 더 행복했을 것 같아서. 그랬다면 네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할머니집에서 1년, 외할머니 손에서 9년을 자라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어린이집 하원차 앞에 다른 아이들처럼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엄마학원에 가자고 할머니를 조르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졸음을 참아가며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얼마 전에 그게 떠올라서 너한테 물어봤잖아.


나: 엄마가 전업주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

초밥: 아니.


내가 이유를 물으니까 네가 뜸만 들이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알 것 같았어. 그냥 기준이니까.



나의 못난이 공주


이전 08화 두 입은 선 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