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우 중에 부부사이가 좋은 분이 있어. 그분은 여전히 아내가 사랑스럽고, 매주 토요일은 아내와 데이트하는 날로 비워놓는데. 엄마와 함께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부럽다고 했어. 그런데 엄마는 왠지 쓸쓸한 거야.
종종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지금 하고 있는 생활은 내가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나한테 맞다고 여기면서도 가끔은 내가 아주 중요한 걸 잃은 것 같거든.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나는 왜 상실감이 들까 하고.
엄마는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지만,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아.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일어난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하고 싶어.
얼마 전에 네가 이런 말을 했잖아.
“엄마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
그건 엄마가 너한테 하는 말에서 네가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엄마가 사람들을 보는대로 너한테 전해진 거야. 반대로 엄마는 너의 말을 듣고 내가 지인들을 고마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엄마는 일요일에 등산을 가서 산우들을 만나는 것 말고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않잖아.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아프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음식이나 작은 선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
그런데 엄마가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야. 예전에 엄마를 생각해 봐. 사람들을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잖아. 초등학교 5, 6학년쯤이었던 너는 처음에는 동조를 해주다가도 내가 하는 노골적인 비난에 친구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 그제야 나는 “나는 왜 이럴까”하며 자아비판으로 대화가 끝나고는 했잖아.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어. 불과 4년 전쯤일걸? 그사이 엄마는 뭐가 바뀐 걸까.
4년 6개월 전에 학원을 폐업하고 마틴 샐리그만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읽었어. 저자는 긍정은 무조건 잘 될 거야라는 낙관과 다르고, ‘계속하는 힘’이라고 했어. 그리고 그 계속하는 힘은 훈련을 통해서 기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훈련 중 하나가 감사일기 쓰기라고 소개했어. 엄마는 글쓰기와 등산을 어떻게든 계속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감사일기를 쓰고 있어.
4년 6개월간 감사일기를 쓰면서 세상과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걸 느꼈어. 내가 이제껏 본 건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이유는 좁은 시야에 갇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시점의 나의 해석본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내가 변하면 해석도 달라지고, 그렇기에 현재는 무한한 가능성의 집합일지 몰라.
좋은 건 한 가지가 아니고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기호가 다른데도 한 가지로 비교하는 것 같아. 사는 일은 감정의 웅덩이에 발이 빠지는 일의 연속이니까 비교와 그에 따른 상실감은 어쩔 수 없어. 다만 지금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렇게 보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라는 걸 잊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엄마도 알아가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