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지켜보며 내가 깨달은 것
서점에 갔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다. 오후 1시, 평소라면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시험기간이라 일찍 마친 모양이었다. 둘, 셋씩 짝을 지은 아이들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고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 옆을 지나는데,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보는지 킥킥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솜털처럼 가벼운 그 소리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책을 하나 골라 결제를 하고 서점을 나섰다. 서점 입구에는 아까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던 아이들이 서있었다.
“넌 어디로 가?”
“난 이쪽.”
“그래. 잘 가.”
한 아이가 두 명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돌아서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친구들과 헤어져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살폈던 것이다. 아이는 커다란 문제집을 가슴에 안고 이내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이의 뒷모습 너머로 가로수의 연두색 잎사귀는 바람결에 경쾌하게 춤을 추며 4월의 싱그러움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아이가 카톡으로 동영상을 하나 보내온 게 있었다. 딸이 친구와 영상통화를 켜놓고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딸이 졸다가 책에 머리가 닿으려고 하자 친구가 “야!”하고 깨우는 장면이었다. 딸은 그 소리에 눈을 번뜩 뜨고 머쓱한지 씩 웃었다. 녹화를 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올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의 하루 일과를 보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와서 야자나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수행평가나 숙제를 하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점점 피로가 누적되어 아이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앉고 하루종일 앉아 있어서 다리가 붓는 게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학교는 삼십 년 전,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 하나만 강요하는 상태에 박제되어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수행평가 폭탄으로 과거보다 더 숨 쉴 구멍이 없는 것 같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예전에는 공부를 안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다수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는 것. 그것도 부모와 조부모의 조력을 받으면서 공부 하나만 매달린다. 그래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하필이면 친구를 사귀어도 성적이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아이가 더 의기소침해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아이는 중학교 때 공부를 더 해두지 않은 걸 후회하는 말을 자주 한다.
“매일 공부를 했는데도 시험이 닥치고 보니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게 다 수학 때문인 것 같아. 수학 공부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겨울방학 때는 진짜 해야 했어.”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나는 수학 과외선생이면서 이런 상황을 ‘강하게’ 말해주지 않은 걸 자책하게 된다.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가 수학문제를 눈으로 풀 때 해설을 써보라고 했고, 강의식으로 하는 학원보다 문제풀이를 교정해 주는 공부방을 추천했다. “겨울방학 때는 진짜 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때마다 받아들이지 않은 건 녀석이었다.
강요를 하지 않은 건 맞다. 강제를 해서라도 말을 듣게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사실 확신이 없었다. 아이가 영화감독이나 뮤지컬 배우처럼 나로서는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는데, 수학만 가르쳐온 내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 아이한테도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한 선택만이 경험으로 남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잠깐의 후회도 그래서 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삶의 한 부분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이제 막 돋아난 연두색 잎사귀를 보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나무가 때가 되면 저마다 다른 열매를 맺는 게 신기하다. 매실, 복숭아, 사과, 배, 은행, 살구 등등 다양하기도 하다. 딸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마치 이 연두색 잎사귀 같다. 약하지만 싱그럽고, 그 안에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이 같다. 17살에 이미 늦었다고 후회하는 건, 어른들이 모두가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내가 교육받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그 빈약한 세계관 안에서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열등감에 시달렸는지 그 시작점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나와 비교하느라 진심으로 축하하고 위로하지 못했던 시간들, 함께 있어도 마음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안에 자라난 동기로 노력을 하면 성장을 하지만,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노력은 스스로를 소모시킨다는 걸. 나는 이것을 마흔이 넘고서야 알았다.
사십 대인 나는 글을 쓰면서 내가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다. 누구의 강요 없이 내 마음이 시켜서 내 안에 자라난 싹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시간을 후회만 하지는 않는다. 내가 겪어온 이런저런 일이 나의 삶이라는 나무를 이루었고, 그만큼 풍성해졌으니까. 그 풍성한 잎사귀가 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도와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