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이 꽤 좋은 날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중학생이 되고부터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하기 전까지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궁리할 때 옳다구나 나의 생일이 있었다. 내 생일을 핑계로 친구들과 평소에는 하지 못한 대담한 일을 감행했다. 그래봤자 멀리 있는 롤러 스케이트장이나 새로 개장한 놀이공원 같은 곳을 찾아가는 일 정도였지만 말이다.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성실하게 나이트클럽을 방문했다. 나의 이십 대의 희로애락과 열정이 담긴 곳은 장서를 구비한 대학 도서관도 배낭을 메고 떠난 낯선 나라도 아닌 화려한 조명과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주와 나는 낮부터 만나서 동성로 거리를 배회했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목적은 티 한 장을 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고, 액세서리 같은 걸 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몇 바퀴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어도 아직 더 보고 싶은 옷, 귀걸이, 구두 같은 건 끝이 없었다. 늘씬한 몸매에다 근사한 스타일의 여성에 비해 내가 후지지 않은지 비교하고, 괜찮은 남자를 티 안 나게 힐끔거렸다. 저녁이 되면 벌떼와 합체해서 호프집에서 목을 축이고 우리의 서식지로 날아갔다.
나에게 생일에 대한 기억은 열기와 들뜬 술렁거림 속에 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도 여름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면 몸으로 기억된 일들이 하나 둘 소환되었다.
글을 쓰다가 그 시절의 감성을 충전받으려고 유튜브에서 ‘1990-2000년대 나이트 댄스가요’를 검색해 봤다. 그래, 이거지, 하며 DJ DOC, 코요테, 쿨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귀신같이 동동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날씨가 덥다 못해 뜨겁더니만 니 생일이더라.”
“나 지금 뭐 하고 있었는지 아냐? 유튜브로 요즘 애들은 모르는 나이트 댄스 듣고 있었다. 댓글 보니까 나 말고도 이거 듣고 우는 추억쟁이들 많다야.”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동동맘과 나는 한참 수다와 안부를 주고받은 뒤 동동맘은 뿌염을 하러 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동동맘의 새치가 감쪽같이 숨겨지길 바라며 다시 이어서 글을 썼다.
며칠 전부터 생일에 뭘 하고 싶은지 자문해 봤다.(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겨우 생각해 낸 게 뭐냐 하면, 한 타임 정도 일찍 수업을 끝내고 월명산을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쯤 걷고, 월명산 근처에 있는 순대국밥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었다.
그 가게는 손순대를 한 접시에 만원에 파는데, 적당한 양과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은 순대가 떨어졌다며 사장님이 미안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순대가 신선했던 이유가 한 번에 많이 만들지 않아서라는 걸 알게 되어 더욱 믿음이 갔다. 그날은 순대 대신에 머리 고기를 주문했는데, 머리 고기도 맛있었다.
저녁을 건너뛰고 운동도 했겠다 술을 마시기 최적의 상태였다. 순대는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여서 막걸리를 먹을 때만 순대를 하나씩 집어먹다 보면 뭐랄까, 딱 알맞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 접시에 삼만 원이라면 가격은 물론이고 양도 부담스럽다. 이왕 산 거니까 하고 먹다 보면 잘 때도 속이 불편하고 아침에도 개운하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재미없는 인간이 되었나 측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생일에도 하고 싶은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다.
월명산을 산책하고 한 접시에 만 원인 순대에다 막걸리를 마시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생일에도 하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평소 참으며 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평범함과 특별함의 구분 없이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나한테는 뭐랄까, 딱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