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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30. 2024

하얀 도화지 같은 엄마 요리

마라토너 산악회는 백두대간 남진(강원도 진부령~ 지리산, GPS거리 735.6km)을 하고 있다. 하산하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뒤풀이를 하기 때문에 전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문제는 전북도민인 회원들이 경상도에 있는 식당을 가면 너도나도 체념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다는 거다. 추풍령 인근 김천의 한 식당에 갔을 때였다.          


“경상도에 왔잖아. 이만하면 괜찮은 거여.”          


그날 메뉴는 다슬기탕이었는데 뚝배기 안에는 다슬기는 안 보이고 배추시래기만 가득했다. 반찬은 기성품 단무지와 고추절임이 전부였다. 대구에서 태어나 30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 자명한 현실 앞에서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당 주인을 대신해서 변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다음 달이 되었다. 백두대간 부항령에서 배재구간을 하고 무주에 있는 한 식당을 갔다. 수북하게 담아준 반찬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주까리, 고사리, 고추부각, 상추대, 더덕 등 저마다 조금씩 다른 슴슴하고 씁쓸한 맛이 입맛을 돌게 했다. 메인 요리인 닭볶음탕은 나오기도 전이었지만 회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전라도여. 확실히 달라.”   

       

그때 서빙하던 분이 “언니야! 더덕 좀 담아도!”라고 소리쳤다. 앗, 경상도 사투리였다. 특히 “언니야”라고 할 때 초성 악센트는 경상도민에게만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면 요리한 분도 경상도민일지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경상도 음식’을 재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나는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한 분을 붙들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경상도 분이신 것 같은데, 혹시 요리한 분도 경상도에서 오셨어요?”     

“예, 우리 언니하고 나는 고향이 대구라예. 근데 언니가 전라도로 시집와가 40년을 살아가 인자는 전라도 사람 다 되었으예.”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남 삼촌이 말했다.   

       

“그러제. 40년 살았으면 전라도 사람이라고 봐야제. 전라도에 살아서 이 맛이 나는 거여.”

“그래도 처음 맛본 음식 맛이 평생을 가잖아요.”          


내가 말했다. 바로 내 이야기다. 우리 엄마는 그 시절 보기 드물게 요리를 못했다. 요즘처럼 학교 급식에다 편의점이 많았다면 나의 도시락에 대한 기억은 이만큼 강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점심과 고등학교는 저녁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도시락을 열고 그날의 반찬을 확인하는 건 매일 똑같은 학교 생활에서 커다란 기쁨이었다. 나를 뺀 다른 아이들에게는. 나는 거의 예외 없이 실망을 안겨주는 도시락을 눈앞에 두고 번민에 휩싸였다. 나는 아이들이 내 반찬을 얼마나 먹나 체크하고, 아이들이 내 걸 하나도 먹지 않는 날은 내 것만 먹어야 했다. 자기는 맛없는 걸 싸와놓고 남의 반찬만 먹는 얌체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알면 잘할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싸 온 반찬이 맛있던 날은 조르륵 엄마한테 가서 알려주었던 걸 보면 말이다.          


“엄마, 단무지를 고춧가루에다 무친 거 먹었는데 맛있었어.”

“단무지를 고춧가루에 무친다꼬?”        

  

얼마뒤 엄마는 단무지 무침을 반찬으로 싸줬다. 하지만 그건 보기에는 친구의 것과 비슷했지만 맛은 달랐다. 그냥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맛이라고 할까. 그때부터 나는 희망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아니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살림을 시작하고 나서야 하얀 도화지 같았던 단무지무침의 비밀이 밝혀졌다. 단무지무침에는 고춧가루 말고도 참기름, 파, 깨소금으로 양념을 해야 하는데, 엄마는 순수하게 고춧가루만 넣은 것이었다. 엄마가 한 음식이 무향 무취 공기 맛이었던 이유는 양념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삼십 년 만에 알게 되었다. 순수한 우리 엄마...         


한 번은 엄마가 시금치나물을 무치는데 참기름 병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날렵한 손목스냅을 이용하여 참기름병을 치켜드는 장면을 포착했다.      

  

“엄마, 안 들어갔어.”

“안 들어갔나?”

엄마가 천진하게 물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란 나는 주방에 서자 그 안에 뭐든 채워 넣고 싶었다. 세상에 요리는 별처럼 많고, 만들어서 먹어보면 저마다 다른 맛과 향이 있었다. 평범한 반찬 하나하나가 내 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만들어보면 웬만하면 맛있고, 자신감이 생기니 더 하게 되고, 하다 보니 점점 더 잘하게 된 것이 나에게 요리다. 엄마가 요리를 잘하는 분들은 뭘 해도 엄마가 한 것보다 부족하겠지만, 나는 뭘 해도 엄마보다 잘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쌓여갔다. 이것이 엄마의 큰 그림이었나. 살면서 하나씩 그려 넣으라는 깊은 뜻이 있었나. 내게 요리에 대한 동력을 심어준 것이 바로 엄마라니 인생에는 이런 반전이 있어서 흥미롭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미각의 기본값이 낮게 설정된 탓에 조금만 맛있어도, 아니 맛이 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음식, 남이 만든 음식 모두. 그야말로 가성비 높은 미각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경상도민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몇 개 안 되는 반찬과 조금은 부실한 내용물이 있는 국으로도 한 그릇 뚝딱해 온 경상도민이라면 누릴 수 있는 음식이 그만큼 더 많을지도.   

          

아주까리, 고사리, 고추부각, 상추대, 더덕
무주 동진가든에서 구입한 산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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