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상담을 3년 동안 혼자 받았다. 남편은 자신은 다 알기 때문에 안 받아도 된다고 했다. 여름휴가 마지막 날, 나는 남편과 청암산 수변로를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당신은 가던 방향으로 그대로 가세요.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갈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함께 걸어왔던 길을 혼자서 걸었다. 한여름 숨 막히게 더운 공기 속을 헤쳐 나가는데 습한 공기 때문인지 눈물이 났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넘치도록 내버려 뒀다. 멈추지 말고, 돌아보지 말고 그냥 걸어가야 한다고 나한테 외쳤다.
지난 시간들이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 튀어나와 괴롭혔다. 나도 잊었던 기억들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공기보다 더 답답한 가슴속을 얼마나 헤맸을까. 어느 순간 주위가 고요해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이 느껴졌다.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때 생각했다. 혼자 걸어도 괜찮구나.
아빠에게 이혼하겠다고 했다. 아빠는 처음에는 나를 달래려고 했고 나중에는 화를 내며 겁을 줬다. 때리거나 바람피우는 남자와 사는 여자도 있다는 이야기부터 이혼녀는 남자들이 쉽게 보고 접근한다는 이야기까지. 어쩌면 자신의 불안이 이끄는 대로 휘청거리며 나까지 흔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십 년 동안 내가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 봐온 사람이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하는 말들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고 아빠는 나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이혼녀인 딸을 보는 자신의 아픔 때문에 정작 힘들어하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한테 하는 그 모든 말이 아빠의 신음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난 이혼녀가 아니라 아빠의 딸일 뿐인데 아빠가 갖고 있는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을 나에게 덮어 씌우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이었는데. 아빠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아빠의 사랑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설 <딸에 대하여>의 엄마도 결국 자신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딸 때문에 힘들어했던 것이 아닐까? 레즈비언인 딸을 둔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딸이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것을 엄마인 자신이 볼 용기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아빠는 넘어져 우는 자식을 보는 자신의 마음이 더 아프기 때문에 일으켜 줬던 것이다. 진짜 자식을 생각한다면 일으켜 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참아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나는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일어서려 했다. 아빠에게 저항하는 것은 나에게는 기존의 관습과 보편적 가치에 저항하는 일이었다. 이제껏 내 인생을 지배해왔던 것과 싸워나간다는 것, 그건 다시 모든 것을 재정립해야 하는 일이었다.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지리산을 갔고 며칠이고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산속에서 나는 딸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생명체였다. 풀뿌리 하나, 나무 한 그루와 다를 바 없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부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내버려 두니 울음은 잦아들었고 나에게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전쟁 같은 싸움과 혼동이 있을 거라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그 사람들 속에는 나의 아빠도 있겠지. 그렇게 바라보니 아빠에 대한 원망도, 나 자신에 대한 연민도 흐려졌다.
소설 속 엄마도 자신이 간호하던 ‘젠’을 병원 규칙을 어기고 집으로 데려온다. 가족도 아닐뿐더러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더욱이 치매가 걸린 ‘젠’이 알아줄 리도 없는데 요양보호사일 뿐인 엄마는 왜 그랬을까. 인간으로서 존엄과 도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예를 하지 못한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사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나서였을까. 죽음을 앞둔 생면부지 젠을 받아준 딸과 레인에게 고마워서였을까? 엄마는 딸과 레인을 받아들이려는 용기를 낸다.‘상관도 없는 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과거, 현재, 미래일 수 있다’는 소설 속 엄마의 입을 빌어 한 작가의 이야기다. 내가 지금 이해 못해 밀쳐내는 누군가는 미래의 나일 수 있다.
가족부터 싸워야 한다.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하면 자신이 괴로워 살 수 없는 관계, 거기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인간다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