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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벗어나면 보이는 것

by 김준정

학원에 할머니가 상담을 왔다.

“상담 전화는 할머니께 드리면 될까요?”

상담 끝에 이렇게 물었다.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느낀 것은 내 기분 탓이었을까? 그렇게 일어서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말씀했다.

“사실 애비가 이혼을 했어. 재혼을 했는데 손녀가 나하고 살겠다고 해서……”

그래도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 어렵게 얘기를 털어놓는 할머니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끄럽지만 내가 그‘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고서야 보였다. 이후로 나는 학생카드에 부모 이름을 쓰게 하지 않았다. 상담을 온 가족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물어보았다.


이혼한 사람은 많지만 숨기고 쉬쉬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 중에도 부모님이 이혼해서 한쪽 부모와 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아이랑 얘기하다가 툭 나와버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아이가 위축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내가 어색하게 대하거나 동정의 눈빛을 보이지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나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딸아이 학부모 모임에서 남편과 별거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모두들 남편 얘기를 하는데, 나만 가만있으면 숨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 왜 그래. 여자는 남편 그늘 아래에서 사는 게 복이야.”

나보다 10살이 많은 언니가 말했다.


그 뒤로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남편과는 어떤지 물었고, 혀를 차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가 불쌍해서 어쩌냐?”

생각해서 해주는 말일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나의 자격지심 때문인 걸까?


“애한테 잘해라. 애가 무슨 잘못이냐?”

졸지에 나는 그냥 ‘이혼녀’라는 단어 하나에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 딸은 ‘이혼녀의 딸’그래서 ‘불쌍한 아이’이렇게 세트로 묶여버리고 말이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 사람 개인의 가치관에서 나온 말이기보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나온 말이니까. 나도 전에는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세상에 대한 적대감과 피해의식으로 날을 세운 채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에는 무뎌지고 싶다. 이왕에 내려선 길이라면 좀 더 넓게 살고 싶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길이더라.'

이런 말을 한다면 허세로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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