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이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사귀자는 말도, 헤어지자는 말도 모두 초밥이가 했다. 능동적인 녀석 같으니라고. 헤어졌다는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다시 사귀자고 하면?”
“절대 안 사귀어.”
단호하기까지 했다.
200일 좀 넘게 사귄 것 같다. 초밥이 전 남자 친구인 정군은 느긋하고도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인물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귀찮아”이고, 주말에 씻기 싫어서 밖에 못 나가는 분이다. 정군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정군과 초밥이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그때 엄마들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사실 자모 모임이란 술 마시고 놀기 위한 떳떳한 명분이 필요한 엄마들이 만드는 것이다. 남편이 회식이라는 핑계로 술 마실 때, 우리는 ‘반 모임’이란 카드를 내미는 거다.
아무튼 정군과 초밥이는 술 좋아하는 엄마를 두었다는 인연으로 1박 2일 여행을 몇 차례 갔었다. 당당한 외박의 기회가 필요했던 엄마들의 욕구의 산물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초밥이의 사랑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1학년 때부터 정군을 좋아한 초밥이는 5학년이 되자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듯) 사귀자고 했다. 안 사귀는 이유를 대는 것이 몹시 귀찮아서인지 몰라도 정군도 사귀는데 합의를 했다. 당시 초밥이가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강한 의무감으로 조언을 했다.
“분명 사귀고 있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속 터질지 모르니까 복대를 준비해.”
“엄마는 이렇게 놀리니까 말 안 할 거야.”
이제부터는 그냥 듣기만 하겠다고, 절대 충고 따위 하지 않겠다고 사정했지만 녀석은 그 뒤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딸아이가 처음으로 남자 친구를 사귀는 데 걱정을 안 할 부모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크리스마스였다. 초밥이는 친구들과 찜질방을 가고 싶다며 나에게 기사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한테도 크리스마스인데 그런 우중충한 곳에 갈 기분이 아니라고 당당하게(보이도록) 말했다. (군산 찜질방의 시설이 개선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엄마는 뭐 할 거냐고 해서 책을 보겠다고 하니 그건 찜질방에서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잠을 자겠다고 하니 그것도 찜질방에서, 글을 쓰겠다고 하니 이것조차 찜질방에서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찜질방이 아니라 만능방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특히 엄마가 좋아하는 안마의자가 있다며 녀석은 이제는 항복하라는 눈빛으로 째려봤다.
나는 그만 포기하고, 멤버가 누구냐고 물었다.
“가은, 의찬 현민, 주희, 윤현, 동혁, 나까지 7명이야.”
“버스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차에 탈 수 있잖아. 그래서 엄마한테 태워달라는 건데?”
전세버스 기사가 된 내가 물었다.
“어라? 정군은 없네? 가족 모임 있데?”
“몰라. 귀찮데.”
큭큭큭. 내 예언이 적중했다. 순간 짜릿한 쾌감이 일어서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몸이 잠깐 튕겨져 올랐다.‘거봐! 내 말이 맞았지?’하면서 막 입을 떼려는데, 초밥이의 눈에서 파박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냉큼 포기하고, 딸의 향후 계획만 물어보기로 했다.
“정군에게 화낼 거야?”
“더 신나게 놀고, 틱톡 영상에도 올릴 거야. 안 간 거 후회하게.”
정군은 안 가고 누워서 영상 보면 편하고 더 좋다고 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헤어질 결심을 한 걸까? (열흘이 지난) 오늘 초밥이는 정군과 헤어졌다고 했다. 비록 그들의 시작과 끝밖에 통보받지 못했지만, 애도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귀차니즘이라는 엄청난 벽 앞에서 쓰러져 버린 사랑. 다음번에는 부지런한 남자 친구를 사귀리라 결심하는 초밥이었다. 아픔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딸을 보니 존경심이 일었다.
그리하여 초밥이의 이상형은 ‘읽씹 하지 않는 남자’가 되었다.
*읽씹: 문자 따위를 읽고 답하지 아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