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수업이 늘어서 오전 11시부터 6시 30분까지 꼬빡 일했다. 끝나자마자 배낭을 챙기고 8시부터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토요일의 여유는 나에게 사치인가, 괜한 반발심에 자는 시간이 줄어드는 걸 걱정하면서도 유튜브를 보고, 이것저것 검색했다. 그러다 결국 12시가 되었고, 2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인정사정없이 울리는 알람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1시간 반밖에 자지 못해 전혀 상쾌하지 않은 몸으로 사과, 오이, 물, 두유, 석류즙, 떡을 살기 위해 챙겼다.
새벽인지 밤인지 헷갈리는 시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이 시간에 나가는 걸 7년째 하고 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현관 출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옆집 아저씨와 마주쳤다.
“아이쿠, 어디 가세요?”
아저씨가 놀라서 물었다.
“산에 가요”
“밤에 무슨 산에 가요.”
나는 그게 아니고요, 하면서 변명할 뻔했다. 나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희남 삼촌과 산악회 때문에 가는 거지 혼자는 절대 못 간다. 아무렴. 누가 뭐래도 나는 유흥을 즐기다가 해뜨기 직전에 귀가하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 파’다. 토요일 밤에 배낭을 메고 나설 때마다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이건 아니야, 소리친다.
오늘은 낙남정맥을 시작하는 날이다. 낙남정맥은 김해시 상동면 동신어산에서 경남 하동군 지리산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238.9km 거리다. 마라토너 산악회에서 이를 12구간으로 나누어 한 달에 한 구간씩 일 년에 걸쳐 완주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오늘 1구간은 김해 매리 2교~낙원 공원묘지까지 24km다. 산을 깎아 공단과 도로가 들어서서 곳곳에 길이 끊겨서 우회해야 했다. 심지어 골프장까지 있어서 회원들이 저마다 길을 찾느라 크고 작은 알바(길 잘못 들기)를 했다. 선두는 골프장을 통과했는데, 직원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고 골프장 출입구를 닫은 모양이었다. 회장님은 이 상황을 전화로 전해 듣고 다른 길을 인도했고, 나야 뭐 길을 모르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회장님을 쫓아가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나, 전재산회장님, 동박님, 오원종님이 산에서 내려와 국도를 걸었다. 5월이지만, 이상 기후는 후끈한 더위를 선물로 주었고 매연과 지열이라는 덤까지 주었다. 세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쫓아갔지만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미아가 되고 싶지 않은데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아, 쫌 천천히 가면 안 돼요.
“회장님! 회장님!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데요?”
질문하는 척하며 회장님을 불러 세웠다.
“12km”
이미 산길을 12km 걸었고, 도로를 4Km를 걸어왔는데 또 12km의 산길이 남았다니. 지금 끝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또 다른 시작을 앞둔 거다. 내 손이 저절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여기서 김해산장 11km고, 택시비는 14,000원 나와요. 택시!”
김해산장은 오늘 코스의 종착지이자 뒤풀이 장소다.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거 찾아보지 마.”
회장님이 말했다.
“스틱 이리 줘.”
회장님은 내 스틱의 한쪽 끝을 잡고 다른 쪽을 나한테 잡으라고 했다. 나는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스틱을 잡고 회장님 뒤를 따라갔다. 아, 편하다. 회장님도 힘들 텐데,라고 생각할 염치는 내게 없었다.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마시자.”
회장님이 말만 들어도 시원한 말을 했다. 도로를 걸으니까 이런 좋은 점이 있었다. 회장님이 커피를 주문하고 나오는 동안 우리 세 명은 감히 커피숍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입구에 몸을 부려놓았다. 내 것이라 해도 전혀 향기롭지 않은 땀 냄새로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시민의식이 커피숍 출입문의 턱을 넘지 못했다.
화사한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커피숍을 들어서는 여성을 보고 있자니, 내가 MBN 방송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이 되어 도시 구경을 나온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커피숍에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회장님이 아아를 들고 나왔다. 자연인 네 명은 아아라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 들고 다시 길 위에 섰다.
진양기맥에만 왔던 산꾼님이 낙남정맥에 신청했다. 산꾼님은 모든 게 취약하지만 그중에서도 오르막이 쥐약인데 오늘은 초반부터 오르내림이 심해서 당연하게도 많이 처졌다. 나는 의욕 고취를 위해 틈틈이 후미 대장인 푸른산님에게 산꾼님이 어디쯤 오는지 물었는데, 그때마다 산꾼님이 아주 먼 곳에서 혼자만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어쩌나, 나는 말로는 걱정하면서 속으로는 산꾼님이 있는 한 나는 꼴찌가 아니라고 안심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산꾼이 택시 타고 와서 선두와 만났다는데?”
회장님이 말했다. 아, 이럴 수가. 산꾼님이 택시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중간을 스킵한 것이었다. 이 포인트에서 내가 왜 배신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나? 아, 이제 나만 남았구나,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김해산장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길이 헷갈려서 선두, 후미 할 것 없이 저마다 다채로운 알바를 했다. 선두로 가던 희남 삼촌, 솔향아, 강산야님이 마지막으로 택시를 타고 들어오면서 전원 무사 귀환을 했다.
*산행 거리 23.5km, 소요 시간: 10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