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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15. 2024

일상을 도보여행자처럼

진양기맥 6구간은 월개재에서 한티재로 이르는 27km의 거리다. 대간, 정맥, 기맥 중에서 기맥이 가장 길이 험하고 봉우리도 많다. 한마디로 기맥이 제일 힘들다는 뜻이다.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전재산 회장님이 15km 지점에 있는 아등재에 버스를 세워둘 테니 물이나 음식을 차에 일부 두고 가라고 말했다.      


나는 진양기맥은 18km일 때도 허덕였는데 27km를 어떻게 가나 걱정하던 차에 회장님 말을 듣고, 잘됐다 오늘은 15km만 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다. 갈 만하면 가고 아니면 그만이지. 지난주 호남정맥에서 소금 같은 싸라기눈을 두들겨 맞고 이틀 동안 오한이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체념 같은 게 생겼다.      


그런데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지난주에 왔던 회원들은 왜 또 신청했을까? 한번 물어볼까?   

  

“허허님 지난주에 힘드셨죠?”

“말도 마요. 죽을 뻔했어요. 족발을 가지고 왔는데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꺼내지도 못하고  포도만 두 알 겨우 먹었당게.”


설상가상으로 허허님은 그 험한 날씨에 큰 것(?) 신호까지 왔다고 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처절한 상황인데 듣는 사람은 왜 이렇게 웃긴 건지 나를 포함한 회원들이 킥킥거렸다.      


“그런데 왜 또 오셨어요?”
“나도 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디.”


허허님도 나와 똑같이 이렇게까지 산에 다녀야 하나 갈등이 심했다고 했다.     


산아산아님은 지난주 버스에서 내리면서 야간에 병원 근무가 있다고 했다. 산행 시간이 길어서 평소보다 늦게 전주에 도착한 데다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근무해야 한다니, 그 말을 듣고 나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산아산아님이 이번 주에도 온 걸 보고 나는 내심 놀랐고 이유가 궁금했다.     


“아들이 입대했는데 군대에서 행군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나도 체험해 보고 싶어서 등산을 시작했는데 해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산이 참 위안을 주더라고, 봐봐. 지난주에 없던 게 오늘은 다 있잖아. 이렇다니까.”     


산아산아님 말대로 오늘은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이었다. 길도 보드라운 흙길이라 걸을 때마다 카펫을 밟는 것처럼 폭신폭신했다.  

    

지난주에 성공하지 못한 탈출의 꿈을 실현시켜 줄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아등재에 도착했지만,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도 날씨처럼 이랬다 저랬다 했다.     




등산을 오래 하다 보면 가까운 산은 지루하고 멀리 가기는 비용과 운전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산행 거리도 어느 정도 되면서 목적이 있는 종주 등산을 하는 산악회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종주 등산은 능선을 따라 봉우리를 넘는 것으로 백두대간, 정맥, 기맥이 있다. 내가 가는 ‘마라토너 산악회’는 매달 둘째 주 정맥, 셋째 주 기맥, 넷째 주는 백두대간을 한다.     


종주 등산은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을 넘어 다른 자연환경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땅끝기맥 마지막 구간에서 거짓말처럼 길이 끊어지더니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고, 호남정맥길에서 보성녹차밭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마치 그곳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은 점을 찍는 거라면, 종주 산행은 선을 잇는 것 같다. 다채로운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후각과 촉각으로 공기의 온도와 냄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새벽에서 오후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흐름 속에서 걷는다. 한겨울에도 가느다랗게 향긋함이 섞인 훈기가 전해지면 아무리 추워도 봄이 오고 있고, 하나의 계절로 말할 수 없는 물결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종주 길은 수시로 길이 끊어진다. 산을 뚫어서 터널이나 도로를 건설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돌아가는 길을 찾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국도를 걸어야 한다. 밀치에서 월계재에 가다가 경남 합천군 가회면의 한 국도를 걸을 때였다. 무심히 바라본 곳에 ‘장대리 삼거리’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오후의 정적 속에 낯선 마을을 걷다 보니 아주 먼 곳에 온 것 같았다. 마치 외국의 낯선 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가 된 것 같은 기분.  

          

차를 탔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지역에 툭 떨어지듯 산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걷는 기분이 꼭 그랬다. 그때 도보 여행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생활 터전을 낯설게 바라보듯이 현재의 내 삶도 이렇게 보고 싶었다. 그건 나에게 일어나는 일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일 테니까.  


등산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최선을 다해 걷지만, 산에서 내려가면 안락한 집에 갈 수 있다. 그래서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치열하게 산을 오르지만,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를 구석으로 몰지 않을 수 있다. 등산을 할 때 생기는 치열한데 느긋한 기분을 일상에 옮겨 오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산을 가는 이유 중 하나다. 

장대리 삼거리
이 여유를 일상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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